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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만원 이하 빚 올해 갚으면 신용 사면 도덕적 해이·성실 상환자 역차별 지적 연체 차주 평가 어려워 은행 건전성 영향

정부가 올해 말까지 5,000만원 이하로 연체한 빚을 갚으면 연체 기록을 완전히 삭제하는 '신용사면'을 실시한다. 하지만 이를 두고 금융업계에서는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와 성실 상환자에 대한 형평성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은행권에서는 차주의 연체 이력이 사라지면 향후 연체율 상승 등의 가능성이 있어 건전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배드뱅크 이어 신용사면, 규모 ‘역대 최대’
13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다음달 30일부터 성실 상환 연체 채무자의 연체 이력 정보 공유 및 활용을 제한하는 신용회복 지원 조치를 시행한다. 지원 대상은 2020년 1월 1일부터 이달 31일까지 5,000만원 이하의 연체가 발생한 개인 및 개인사업자 324만 명이다. 이 중 연말까지 연체 금액을 모두 상환하면 기존 연체 이력 정보를 지워준다.
이는 대상 규모로나 범위로나 사상 최대 수준의 신용사면이다. 1999년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활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약 40만 명의 연체 이력을 삭제했으며, 2013년 박근혜 정부 땐 10만 명에 대한 신용사면을 단행했다. 지원 대상은 코로나19를 기점으로 가파르게 늘어 2021년 문재인 정부 땐 250만 명, 윤석열 정부에선 290만 명의 연체 기록을 지웠다.
이번 신용사면은 이재명 정부가 앞서 장기 소액 연체 채권에 대한 채무탕감 정책을 발표한 뒤 성실 상환자가 역차별을 받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자 인센티브를 마련한 것으로 풀이된다. 기존엔 빚을 다 갚아도 연체 이력 정보가 신용정보원에 1년 동안 남아 있고, 신용평가사엔 최대 5년간 공유돼 대출 금리나 한도, 카드 이용 등에 불이익을 받았다. 금융위는 “이번 조치에 따라 성실하게 채무 변제를 완료하면 신용평점이 올라가 금융거래에서 각종 불이익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신용점수 왜곡 우려
그러나 역대 최대 규모의 신용사면을 놓고 금융권에선 ‘빚을 제때 갚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모럴해저드를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악의 경우 똑같이 따라 하는 이른바 '레밍 신드롬'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연말까지 편법 차환 수요도 기승을 부릴 것으로 전망된다. 예컨대 대출기록이 안 남는 사채업권에서 돈을 빌려 우선 상환하고, 연체기록이 삭제되면 다시 제1금융권에서 돈을 빌려 되갚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편법대출을 알선하는 브로커가 등장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신용사면의 또 다른 문제는 신용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한다는 점이다. 연체 이력 정보가 모두 삭제되면 신용점수는 오르게 되는데, 지난해 290만 명 신용사면 땐 개인 신용점수가 평균 31점 상승했었다. 신용점수가 계속해 상향 평준화되면 금융사는 대출 심사 기준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은행 관계자는 “이전에는 1,000점 만점 기준 신용점수 500~600점을 중신용자로 봤다면, 이제는 700~800점은 돼야 한다”며 “신용사면과 같은 인위적인 조정이 신용평가 체계의 불신을 키우고 변별력을 하락하게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가계대출 규제로 높아진 대출 문턱은 더 오를 것으로 보인다. 이미 신용 1등급(KCB 기준 942점 이상)이 아니면 대출이 쉽지 않은 상태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6월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에서 가계대출(신규 취급액 기준)을 받은 차주의 신용 점수는 평균 944.2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카드사 연체율 최고치, 재연체 등 리스크 우려 확산
가뜩이나 건전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2금융권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특히 카드사들은 신용사면으로 신용카드 발급이 증가하고 카드론 등 대출이 늘어날 경우 연체율 관리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카드사를 찾는 차주는 중저신용자가 많은데 신용점수가 회복돼도 상환 능력 개선이 담보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신용점수 상승으로 재대출 후 상환이 지연되는 악순환 고리가 이어질 수도 있다.
이미 지난 1분기 전업 카드사 8곳의 실질 연체율(대환대출 채권을 포함한 1개월 이상 연체율)은 평균 1.93%로 10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카드업계는 연체율이 2%를 넘으면 위험신호로 본다. 한 카드업계 관계자는 “이미 연체를 했던 고객이 새롭게 유입되면서 잠재 리스크가 커졌다”며 “상환 능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저신용자나 다중채무자가 카드사로 몰릴 수 있는 만큼 리스크 관리를 더욱 강화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통상 신용카드 연체는 금융 부실의 도화선으로 꼽힌다. 카드 이용자 상당수가 다중채무자인 만큼, 연체 확산은 금융권 전반의 연쇄 부실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신용사면 주기가 1999년 외환위기 이후 2013년, 2021년, 2024년에 이어 올해까지 14년→8년→3년→1년으로 급격히 단축되면서 금융권에 불확실성이 커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신용사면은 제도 취지에도 불구하고 시장 원리에 맞지 않는 정책이 지속되고 있다"며 "정보 부족으로 금융기관이 대출을 꺼리게 되고, 담보 중심 대출 문화 속에서 불법 사금융이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