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트럼프 관세에 힘 빠진 달러화 美 재정 신뢰 악화, 불확실성 등 악재 감세안·연준 압박도 달러 가치에 독

미국 달러화가 전통적인 안전자산 역할에서 벗어나 다시 ‘위험자산’처럼 거래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됐다. 이러한 전환이 당장 현실화할 가능성은 낮을 수 있으나, 단기적으로는 달러화의 변동성이 상당할 수 있다는 경고다. 이는 단순한 환율 조정 국면이 아닌, 구조적 정책 리스크에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독립성을 뒤흔드는 압박 공세가 달러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양상이다.
안전자산 지위 우려
10일(이하 현지시각)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카렌 라이히고트 등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들은 최근 보고서에서 “달러화가 최근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다”면서 무역 관세, 정책 불확실성, 재정 건전성 우려 및 미국 자산으로부터의 투자 다각화를 달러화에 잠재적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골드만 애널리스트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글로벌 교역국을 상대로 강력한 관세 부과를 위협하면서 올해 들어 달러화가 급격히 하락한 점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달러의 전통적인 안전자산 지위에 영구적인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관측까지 제기됐다. 골드만삭스는 “상관관계의 변화로 인해 위험 회피(risk-off) 국면에서 달러 강세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블룸버그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달러화는 최근 수 주간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일부 지표상으로는 여전히 위험자산처럼 거래되고 있다. 특히 달러와 주요 10개국(G10) 통화 변동성 지수 간의 상관관계는 현재 7년 만에 최저 수준에 근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달러가 과거처럼 시장 불안시 자금을 몰아들이는 안전자산 역할보다는 오히려 변동성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지난 15년 동안 달러는 대부분 G10 통화 변동성 지수와 강한 양(+)의 상관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최근 그 관계가 크게 약화됐다.
트럼프 리스크에 하방 압력
지난 3일 미 의회를 통과한 트럼프 대통령의 감세법안인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OBBBA)도 약달러를 가속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국방비 증액, 국경 장벽 건설, 서비스 노동자의 팁 과세 폐지, 저소득층 의료보험 지출 삭감 등 갖은 정책을 포함한 이 법안은 앞으로 10년간 재정 적자를 약 3조 달러(약 4,067조원) 늘릴 것이라는 계산이다.
미국 재정 적자는 5월 기준으로 36조2,200억 달러(약 4경9,118조원)에 달한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재정 적자 급증을 이유로 지난 5월 미국의 신용등급을 최고 등급(AAA)에서 한 단계 강등했다. 대규모 감세로 재정 적자가 더욱 커지면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해야 하고, 국채를 더 많이 찍을수록 금리는 올라 정부의 채무 상환 부담은 그만큼 더 커지게 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을 향한 금리 인하 압박도 달러 가치에 독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에 미국보다 기준금리가 낮은 나라가 34국에 달한다는 친필 게시물을 올리며, 현재 4.25∼4.5%인 미국 기준금리를 1% 또는 그 아래 수준까지 대폭 내릴 것을 촉구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중앙은행 압박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습에 달러화에 대한 신뢰가 금 가고 있다는 평가다.

금·스위스 프랑 수요 증가 전망
달러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자, 시장은 대체 자산에 대한 재평가에 나서고 있다. 가장 주목받는 대상은 단연 금이다. 올 들어 금 현물 가격은 약 30% 올라 일본 엔화와 미국 국채보다 높은 상승률을 기록하며 투자자들에게 새로운 안전자산으로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각국 중앙은행들은 총 144.6톤을 준비자산으로 매입해 3년 연속 1,000톤 이상 사들였다. 최근 유럽중앙은행(ECB)은 금이 유로화를 제치고 2위 외환보유 자산이 됐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작년 말 기준 금은 전체 외환보유액의 약 20%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품 투자 컨설팅업체 메털 포커스의 니코스 카발리스 매니징 디렉터는 "미국 국채나 다른 국가들의 채권, 심지어 통화도 결국엔 그 국가 경제에 대한 투자"라며 "그러나 금은 아무의 부채도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국채와 달리 거래 상대방 리스크가 없다는 점도 금의 장점이다. 캐나다 TD증권의 바트 멜렉 전략가는 "금은 본질적 내재 가치가 있다"며 "이는 정부나 민간에 채무 상환 의무가 없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어 "글로벌 중앙은행들의 매수 역시 안전자산으로서의 매력을 증가시킨다"고 전했다.
스위스 프랑에 대한 수요도 크게 늘었다. 정치적 중립성과 재정 안정성, 낮은 인플레이션 이력 등은 스위스 프랑을 새로운 안전자산으로 떠오르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유럽 내 고액자산가들은 달러 예치 비중을 줄이는 동시에, 프랑 자산 비중을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의 사로지 바타라이 교수는 "현재 시장이 선호하는 안전자산은 스위스 프랑과 금"이라며 "지금 미국은 마치 신흥국처럼 보인다. 정책 불확실성이 위험 프리미엄을 높이고, 그로 인해 장기 금리가 상승하고 통화 가치는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