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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기준 제시로 시장 예측 가능성 확대 공모주 배당 등 모범 사례 제시 방안 유력 중복상장 유형별 범위 해석이 관건 될 듯

국내 증시의 신규 상장 심사를 전담하는 한국거래소가 ‘중복상장'에 대한 심사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상장 업무를 전담하는 업계에 전달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그동안 중복상장의 개념·유형·허용 여부를 두고 시장 내 혼선이 있어 온 만큼 명확한 기준을 밝혀 시장 참여자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중복상장 기업의 모회사 주주에게 공모주를 일부 배당하는 등 주주 보상을 강화하는 모범 사례를 가이드라인에서 제시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중복상장 금지 현실화” 거래소, IB업계 의견 수렴 돌입
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한국거래소는 최근 중복상장 가이드라인 준비를 목표로 업계 의견 수렴 작업에 착수했다. 중복상장 기업에 대한 심사 기준을 이른 시일 내에 투자은행(IB)업계 내 상장 주관 업무 담당 부서에 직접 제시하겠다는 목표다. 신규 가이드라인의 핵심은 모회사 주주들에게 보상을 강화하는 데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상장사가 자회사 기업공개(IPO)를 추진하면 공모주 일부를 주주에게 우선 배정 또는 배당하는 것이 모범 사례로 제시될 수 있다. 관련해서는 2023년 상장한 첨단장비 제조기업 필옵틱스의 모회사 필에너지가 공모주 20%를 주주에게 배당한 전례가 있다.
예정대로 가이드라인 신설이 완료되면 중복상장을 둘러싼 시중 혼선은 일부분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거래소는 매년 공개하는 ‘상장 심사 가이드라인’에서 중복상장 심사 기준을 일부 밝히고 있는데, 이번 작업을 통해 관련 내용을 보다 구체화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거래소의 심사 기준이 보다 구체화돼 직접 전달되면 IB업계에서도 사전 준비 작업을 면밀히 할 수 있게 된다.
추후 관건은 중복상장에 대한 유형별 정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중복상장은 △모회사가 사업 부문을 별도 법인으로 물적·인적 분할해 상장시키는 경우 △법인을 신규 설립해 상장시키는 경우 △타 법인을 인수한 후 상장시키는 경우 등 유형이 다양하다. 모회사가 사업 회사인 경우와 지주 회사인 경우 특성에 차이가 있고 영업·경영 독립성, 주주 보호 장치 등도 각기 다르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부터 비판해 온 ‘쪼개기 상장’은 핵심 사업 부문을 분할한 후 증시에 중복으로 올리는 경우를 말하는데, 이외 경우까지 광의의 중복상장으로 볼 지가 변수로 지목된다.
대기업 자금 조달 전략 수정 불가피
중복상장 논란은 올해 1분기 LG CNS 사례를 계기로 본격 불붙었다. IPO 시장의 대어로 꼽히던 LG CNS가 상장을 추진하던 당시,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중복상장 이슈가 공론화됐다. 이현규 LG CNS 최고재무책임자(CFO)는 IPO 기자간담회에서 "LG CNS는 ㈜LG에서 물적분할된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중복상장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LG 주요 계열사들의 잇따른 상장이 지주사 디스카운트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논평을 내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최근 상장을 중단한 SK엔무브도 중복상장 이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SK엔무브는 지난 4월 한국거래소 예비 심사 전 사전 협의에서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의 주주 피해를 막을 수 있는 투자자 보호 계획안을 마련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SK엔무브는 2009년 SK이노베이션(옛 SK에너지)의 윤활기유 사업이 물적분할되면서 만들어졌고 17년이 지났음에도 엄격한 심사를 받았다.
여기엔 이달 1일부터 물적분할 5년룰이 사라지고 물적분할한 모든 자회사 전반에 강화된 규정이 적용된 영향이 컸다. 물론 SK엔무브가 IPO를 철회한 데는 거래소의 강화된 심사 탓이라고만 할 수 없지만, 중복상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금융당국의 분위기를 피해 가긴 어려웠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결국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은 100% 에코솔루션홀딩스가 보유한 SK엔무브 지분 30%(8.592억원)를 매입해 100% 자회사로 편입한 상태다.
업계에서는 중복상장 가이드라인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무엇을 중복상장으로 볼 지와 어떻게 관련 논란을 해소할 수 있을지에 대한 혼선이 있어왔다”며 “모범 사례와 기준이 제시된다면 상장 준비 과정에 있어왔던 비효율이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모기업·자회사 동시 상장으로 ‘기업가치 희석’, 자본시장 발전 저해
중복상장은 대표적인 국내 증시 저평가 요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증시의 중복상장 비율은 18.4%로 일본(4.3%), 대만(3.1%), 중국 (1.9%), 미국(0.3%)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다. 미국의 경우 버크셔해서웨이가 투자회사로서 보유한 지분이 대부분으로, 실질적 중복상장으로 보기 어렵다. 중복상장 비율은 '주식시장 전체 시가총액에서 상장사가 보유한 타 상장사의 지분 가치의 총합을 나눈 값'이다. 즉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시가총액 2,322조원 중 417조원 정도가 중복으로 계산됐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중복상장 비율이 높은 이유는 LG에너지솔루션, 카카오뱅크, 카카오게임즈, 카카오페이, SK바이오팜, HD현대마린솔루션 등 모기업이 상장된 대기업 계열사들의 상장이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88개 대규모 기업집단의 소속회사는 3,318개며, 계열사 숫자는 SK 219개, 카카오 128개, 한화 108개, GS 99개, 롯데 96개, 태영 82개, 현대차 70개, CJ 73개, 삼성 69개, LG 60개다.
이 중에서 SK그룹에는 20개의 상장사가 있는데 대부분 중복상장이며, 삼성 17개, 현대백화점 13개, 현대차 12개, LG 11개, 한화 11개, 롯데 11개, 카카오 10개의 상장사도 비슷한 상황이다. 결국 중복상장의 근본적 원인은 그룹 총수 일가의 이해관계라는 뜻이다. 모기업 지배주주 입장에서는 사업 확장에 필요한 자본을 자신들이 직접 부담하지 않아도 되고, 수많은 자회사를 거느리면서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외 주요국에서는 모기업이나 지주회사가 상장하게 되면, 자회사나 관계사를 상장시키지 않아 이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예컨대 구글의 지주회사인 알파벳은 상장회사지만 자회사인 구글은 비상장사다. 시장에서 평가되는 기업가치에는 모든 자회사들의 실적들이 반영돼 굳이 자회사를 별도로 상장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중복상장은 주식시장 전체에 착시효과와 왜곡 현상을 보일 뿐만 아니라, 모기업과 자회사 간의 이해관계 상충으로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소액주주의 권리 보장이 잘 돼 있는 국가에선 금기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중복상장 비율이 증가하면 이중으로 계산된 비율만큼 주가수익비율(PER)이나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현재 기준으로 보수적으로 평가해도 전체 상장기업 순이익의 10~15%가 중복 계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중복상장 비율이 계속해서 증가하면 주가 할인도 함께 커지게 된다. 자본시장연구원에서도 실증분석을 거쳐 한국의 중복상장 비율이 한국 증시의 구조적 저평가로 이어지고 있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