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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대기업들 IPO 행선지 바꿔
CATL 상장 성공이 촉매제 역할
‘이중상장’ 러시, 자금 조달 본격화

중국 대기업들이 본토를 벗어나 홍콩증시로 상장 무대를 옮기고 있다. 지난 3월 세계 최대 규모 기업공개(IPO)로 기록된 CATL의 홍콩 상장 성공이 기업들의 전략 변화에 불을 지핀 가운데, 쉬인(SHEIN) 등 주요 업체들도 홍콩 IPO를 추진하고 나섰다. 중국 정부 또한 외자 유입과 자금조달 유연화를 위해 홍콩증시를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본토 A주에 상장된 기업 가운데선 홍콩 이중상장에 나서는 사례 또한 심심찮게 포착된다.
본토·서방 증시보다 IPO에 우호적 환경
4일(이하 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올해 들어 홍콩에서 IPO 및 추가 주식 판매 규모는 265억 달러(약 37조원)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38억 달러·약 5조원) 대비 597%가량 증가한 수치로, 2021년 정점을 찍은 이래 가장 큰 규모다. 자금이 몰리자 홍콩 항셍지수도 2만3,000선을 넘어서며 반등세를 보였다. 항셍지수는 미·중 관세 전쟁 여파로 저점을 찍은 지난 4월 7일 이후 이달 3일까지 19.83% 회복했다.
다수의 중국 대기업이 IPO를 앞두고 있다는 점은 이 같은 회복세에 긍정적 전망을 더한다. 중국 패스트패션 브랜드 쉬인은 그간 추진 해 온 런던 IPO를 포기하고 홍콩 증시에 상장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영국 금융행위감독청(FCA)으로부터 신규 상장 승인까지 받았지만, 중국 규제 당국의 문턱을 넘지 못한 탓이다.
중국 증권규제당국의 런던 IPO 승인 보류는 쉬인을 둘러싼 국제 사회의 지속적인 감시를 고려할 때 놀랍지 않다는 것이 시장 참여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쉬인은 지난해 하반기 아동을 포함한 노동자들에게 하루 16시간 근무를 강요하고, 임금을 보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의 중심에 선 바 있다. 나아가 실적이 기대 이하라는 점도 걸림돌로 지적됐다. 쉬인의 지난해 매출은 380억 달러(약 51조원)로 당초 계획인 450억 달러(약 61조원)에 크게 못 미쳤다.
중국 최대 철강 전자상거래 플랫폼 자오강(找钢)은 두 번째 도전 끝에 홍콩 IPO에 성공했다. 지난 2018년 8월 첫 번째 도전에서는 고배를 마셨지만, 이번 시도에서는 수수료가 창출되는 위탁거래 비중 확대와 파생 사업인 물류 공급망 서비스, 중소 고객에게 제공하는 철강 솔루션, 해외시장 진출의 미래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전언이다. 상장 첫날 공모가 10홍콩달러로 시작한 자오강의 주가는 부동산 경기 둔화 등 철강 산업 전반적인 악재에 기인해 7.8홍콩달러까지 밀렸으나, 곧바로 회복해 10.02홍콩달러로 장을 마쳤다.

글로벌 자금 접근성 상하이보다 높아
최근 홍콩 IPO 시장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사례로는 중국 최대 배터리 기업 CATL의 IPO 흥행을 꼽을 수 있다. 지난 3월 20일 홍콩 증시에 입성한 CATL은 상장 당일에만 46억 달러(약 6조원) 상당의 자금을 조달하며 세계 최대 규모의 IPO를 성사시켰다. CATL은 상장 과정에서 군과의 연관성 및 인권 침해 등 일부 논란을 낳기도 했지만, 중국 당국의 강력한 지원 아래 무리 없이 절차를 마쳤다.
CATL은 상장을 통해 조달한 자금을 헝가리에 73억 달러(약 10조1,800억원) 규모로 계획된 배터리 생산시설 건설에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 BMW, 스텔란티스, 폭스바겐 등 주요 유럽 완성차 업체에 대한 공급 확대를 추진한다는 설명이다. 2024년 기준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CATL은 38%의 점유율로 1위를 유지 중이며, 이번 유럽 공장 투자로 지역 다변화와 고객 기반 확대 또한 가속할 전망이다.
이는 중국 당국이 의도한 전략이기도 하다. CATL은 중국 정부가 가장 집중적으로 육성 중인 전기차 배터리 산업 내 대표 기업으로, 이번 IPO는 단순한 자본조달을 넘어 국가 산업정책의 상징적 결과물로 받아들여진다. 홍콩을 통해 조달된 자금이 실질적으로는 본토 산업 육성에 투입되는 이러한 구조는 중국 정부가 양쪽 시장을 동시에 활용하는 ‘전략적 이중 구조’를 취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산업 부양책 맞물리며 정부 차원 ‘이중 전략’ 가동
CATL의 성공 이후 중국 기업 사이에서는 이중 상장이 하나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는 양상이다. 중국 본토의 A주에 상장된 상태에서 홍콩증시에 추가 상장해 해외 자금을 유치하려는 시도가 급증한 것이다. 중국 본토 A주 의약·바이오 섹터의 대장주로 꼽히는 항서의약(恒瑞醫藥)이 대표적 예다. 항서의약은 연내 홍콩증시 상장을 통해 최소 20억 달러(약 2조7,000억원)를 조달한다는 구상이다.
앞선 CATL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기업 차원의 선택이 아니라 중국 정부의 정책적 유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본토 자본시장의 경색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부는 외자 유입과 기업 자금조달을 원활히 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홍콩을 활용하고 있다. 일종의 분산 리스크 관리이자, 글로벌 자본시장과의 우회적 연결고리인 셈이다. 상하이, 선전 등 중국 본토 시장과 달리 서방 자본의 접근성이 높고, 유연한 규제 덕에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 역시 홍콩 증시의 특징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홍콩증시의 회복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커지고 있다. 국내에선 이른바 ‘중학개미’로 불리는 중국 주식 투자자들이 다시 홍콩시장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기관투자자들 역시 CATL, 자오강과 같은 대형주의 등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홍콩의 시장 거래량과 외국인 자금 유입 속도가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는 만큼 제도적 유연성과 정책적 지원이 결합하면서 중장기적 부활을 앞당길 것이란 관측에서다.
다만 이러한 긍정적 전망이 현실로 일어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불신이 여전한 데다, 회계 투명성과 공시 기준, 통제 리스크 등은 여전히 시장의 불안요인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의 의지가 확고하더라도, 글로벌 투자자들의 신뢰 회복 없이는 홍콩을 통한 자본조달 구조가 장기적으로 안착하긴 어렵다는 게 일부 신중론자의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