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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차별 주장 통한 금융기관 공격 본격화 스테이블코인 법제화 연계된 대체 인프라 정착 시도 전통 금융 권력 약화 기반의 정치적 축 이동 의도도

JP모건과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계좌 개설 거부를 공개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념적 차별을 이유로 금융기관을 정면 겨냥하고 나섰다. 은행의 디뱅킹(debanking)을 계기로 행정명령 발동을 예고하며, 금융 접근성에 대한 규제 체계 전반에 정치적 긴장을 불러오고 있는 모습이다. 스테이블코인 입법과 맞물린 이번 조치는 전통 금융 인프라에 대한 도전이자, 대체 질서 구축을 위한 전략적 포석으로 읽힌다.
트럼프 “JP모건·BOA, 나를 고객으로 거부”
5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CNBC 방송 ‘스쿼크박스(Squawk Box)’와의 인터뷰에서 “JP모건으로부터 수억 달러의 현금을 20일 안에 다른 은행으로 옮기라는 통보를 받았다”며 “10억 달러(약 1조3,800억원) 이상의 자금을 BOA에 예치하려 했지만, 해당 은행으로부터 계좌 개설이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브라이언 모이니핸 BOA 최고경영자에게서) ‘우리는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며 “그래서 다른 은행을 찾았고, 결국 여러 소규모 은행에 돈을 나눠 예치했다. 여기저기 1,000만 달러(약 138억원)씩 넣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은행들이 나를 심하게 차별했다. 나는 그들에게 잘해줬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며 “이 같은 조치는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규제당국이 은행들에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기업과 개인을 대상으로 한 금융기관의 디뱅킹 행위에 대응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공개된 행정명령 초안에는 암호화폐 기업과 보수주의자를 대상으로 한 차별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금융기관이 정치적 이유로 고객을 차단할 경우 벌금, 동의 명령(consent decree), 기타 징계 조치를 가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또한 금융기관이 신용기회균등법, 반독점법 및 소비자 금융보호법을 위반했는지 조사하라는 지시도 담겼다.

제도 불신 조장 통한 정치 공세
전문가들은 이 같은 행보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정치 공식과 일치한다고 입을 모은다. 개인적 갈등을 공공 의제로 확장시키고, 이를 통해 제도 전반에 대한 불신을 제기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번에는 감정적 서사를 넘어 제도 설계에 실질적 개입이 수반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대립 구도를 넘어서는 정치·경제적 재편의 신호로 해석되고 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의 금융기관 공세는 그가 최근 서명한 ‘지니어스법(GENIUS Act·미 스테이블코인 혁신법)과 궤를 같이한다. 해당 법안은 달러 연동형 디지털 자산인 스테이블코인의 발행과 유통을 연방 차원에서 제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디지털 자산 사업자들은 기존보다 간소화된 규제 경로를 통해 합법적 기반을 확보하게 됐고, 동시에 전통 은행의 지급 결제 인프라에 대한 독점적 지위는 근본적 도전을 받게 됐다.
스테이블코인은 암호화폐의 유연성과 법정화폐의 안정성을 결합한 형태로, 빠르고 저렴한 거래를 가능하게 한다. 특히 탈중앙화된 특성으로 인해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금융 시스템과의 차별성을 갖는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은행은 이념에 따라 금융 접근을 차단한다’는 프레임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CNN은 트럼프의 이런 행보가 단순한 반(反)금융권 수사가 아닌 금융 인프라 자체에 대한 지배권 확보를 겨냥한 전략적 조정이라고 진단한다. 전통적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를 체계적으로 약화시키는 한편, 대체 인프라로서의 디지털 화폐를 제도화함으로써 새로운 영향력의 중심축을 형성하려 한다는 것이다.
제도 개선 넘어선 권력 재편 의도
트럼프 대통령이 구축하는 내러티브는 단순하다. ‘이념으로 차별하는 은행’과 ‘모두에게 열려 있는 블록체인’이다. 이 이분법은 금융기관에 대한 대중의 피로감, 그리고 공정성을 둘러싼 논쟁과 맞물리며 강한 정치적 파급력을 형성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겨냥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지니어스법안 통과는 친(親)트럼프 성향의 벤처캐피탈, 빅테크, 정치 네트워크가 금융 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 진입 장벽을 실질적으로 낮췄다. 이들은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정치 자금을 조달하고, 자체 생태계를 구축하며, 심지어 기존 국제 결제망을 우회하는 대안을 설계할 수 있게 됐다.
이번 법안 통과가 단순한 제도 개혁이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전통적 금융 권력이 휘청이는 틈을 타 새로운 금융 질서의 중심에 자신을 위치시키려 한다고 보고 있다. 실제 금융 인프라의 통제권은 곧 정치 권력의 핵심 기반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 권력 축을 재편하려 하고 있다.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를 조직적으로 흔들고 그 대안으로 법제화된 디지털 자산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인프라를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흡수하려는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향후 금융 전선은 더욱 첨예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규제 권한을 기반으로 한 은행 시스템과 탈중심성을 앞세운 디지털 금융 생태계 간의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디지털 화폐를 자신의 정치 플랫폼에 결합시키는 전략을 지속한다면 이번 디뱅킹 논란은 단순한 담론을 넘어 전면적 질서 재편의 신호탄으로 작동할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