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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처분 소득 중 소비 비중 줄어
실질소득 정체에 소비 여력 위축
산업 붕괴·저성장 고착화가 본질

장기화한 경기 침체의 원인이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 변화에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지금과 같은 경기 불황 이면에는 한국 사회 전체의 인구·소득·심리 변화가 자리하고 있단 설명이다. 그러나 이는 본질을 흐리는 시선이라는 반론 또한 거세다. 문제의 핵심은 소비 기반 자체가 무너진 데 있으며, 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근본적인 해결책 또한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경험·가치에 중점 둔 소비 트렌드 변화
4일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에 따르면 국내 소비자들의 평균소비성향(APC)은 2014년 73.6%에서 2024년 70.3%로 3.3%p 하락했다. 30대 이하(73.7%→71.6%), 40대(76.5%→76.2%), 50대(70.3%→68.3%), 70대(79.3%→76.3%) 등 모든 연령대가 10년 전보다 낮은 APC를 나타냈으며, 특히 60대는 69.3%에서 62.4%로 가장 큰 하락 폭(6.9%p)을 그렸다. 소득 총액에 대한 소비 지출 총액의 비율을 의미하는 APC는 소비지출액을 가처분소득으로 나눠 계산한다.
소비 구조 또한 변화를 보였다.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를 바탕으로 연령대별 소득과 소비지출 및 소비성향을 분석한 이번 보고서에서 10년간 지출 비중이 증가한 항목은 보건(7.2%→9.8%), 오락·문화(5.4%→7.8%), 음식·숙박(13.7%→14.4%), 주거·수도(11.5%→12.2%) 등이다. 반면 식료품·음료(15.9%→13.6%), 의류·신발(6.4%→4.8%) 등 전통적인 생필품과 교육(8.8%→7.9%) 등은 하락했다.
보고서는 이번 분석이 단순한 소비 행태 변화를 넘어 산업구조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근무 대한상의 유통물류진흥원장은 “소비 부진은 단순한 불황 때문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인구·소득·심리 등이 변화해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그만큼 단기 부양책으로 회복을 이끌기엔 한계가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세대별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정책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 활력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소비자 책임론’ 프레임은 왜곡된 해석
하지만 전문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장기화한 경기 침체의 원인을 소비 패턴 변화에서 찾기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 원인으로는 수출 둔화로 인한 가계 소득 감소가 꼽힌다. 한국 경제의 뿌리와도 같은 제조업 수출이 최근 수년간 글로벌 수요 부진과 가격 경쟁력 약화로 큰 타격을 입은 가운데, 기업이 벌어들이는 돈이 줄어들면서 근로자들의 소득도 감소했다는 설명이다. 이는 곧 소비 여력 감소를 의미한다.
실제로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3년과 2024년 노동자 1명당 월평균 실질임금은 363만9,000원과 373만2,000원으로 각각 전년 대비 2.5%, 1.7% 감소했다. 올해 1분기 실질임금은 379만7,000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3% 증가하긴 했지만, 이는 명목임금이 1년 전보다 4.5% 오르는 동안 소비자물가지수가 2.1% 오르는 데 그친 데 따른 것으로 물가 향방에 따라 급변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러한 흐름은 국내총생산(GDP)에도 뚜렷이 반영되고 있다. 지난 1분기 한국 경제는 내수 부진만으로도 0.2%의 역성장을 기록했으며, 수출 회복 없이 2분기 역시 저성장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한국은행은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인해 통상 환경에 대한 불안이 커진 분위기가 투자와 소비 회복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향후 수출과 성장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내놓기 어렵다”고 밝혔다.
수출 중심 경제 상황에서 내수만으로 버티기 역부족
이와 함께 주력 산업의 붕괴와 그에 따른 구조적 저성장이 본질이라는 진단 또한 설득력을 얻는 모습이다. 특히 석유화학 산업의 추락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국제 유가 하락과 글로벌 공급 과잉, 중국·중동 업체들의 가격 공세 등으로 한국의 석유화학 수출은 2024년 기준 20% 이상 급감했다. 이는 국내 제조업 수익성 악화로 직결돼 산업 전반의 활력을 갉아먹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한때 ‘효자 산업’으로 불리던 석유화학이 경제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운 셈이다.
문제는 이 같은 부진이 단지 석유화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반도체, 철강, 디스플레이 등 그간 한국 수출의 큰 축으로 기능해 온 산업들 대부분이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에서 글로벌 경쟁사에 밀리고 있다.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하드웨어 강국’으로 불렸지만, 최근에는 혁신의 동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짙어지는 배경이다.
이러한 산업 약화는 저성장을 고착한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수출 둔화로 인한 기업 실적 악화는 고용 감소 및 임금 정체로 이어져 소비를 위축시키고, 종국에는 내수 부진과 성장률 하락이라는 악순환으로 굳어진다. 정부는 정책적 대응을 시도하고 있지만, 이미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을 상실한 산업 구조를 단기 재정 투입으로 되살리기엔 역부족인 실정이다. 규제 완화나 세제 지원만으로 회복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는 게 산업계의 중론이다.
장기화한 내수 부진과 소비 위축을 둘러싸고 소득과 산업의 미래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비 구조가 바뀐 것이 아니라, 소비할 수 있는 기반이 무너졌단 지적이다. 이러한 문제는 일시적인 불황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경제 체질 자체를 재설계하지 않으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위기에 가깝다. ‘소비 패턴의 변화’가 아니라 ‘산업 구조 붕괴’가 진짜 문제라는 분석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