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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40년 만기 국채 수익률 사상 '최고치' 일본은행 국채 매입 축소에 시장 수요 약화 달러·엔 환율도 하락하며 엔화 가치 상승세

일본의 초장기 국채 수익률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국채 시장의 불안이 확산하고 있다. 일본은행(BOJ)의 국채 매입 축소 기조에 더해 주요 기관 투자자인 보험사들의 소극적 대응과 부진한 20년물 입찰 결과가 겹치며 장기물을 중심으로 매도세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재정 건전성 우려와 정치적 불확실성, 그리고 지난해 '블랙 먼데이'를 촉발한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 가능성까지 맞물려 투자 심리도 극도로 위축되고 있다.
투자자들 불안 심리에 국채 입찰 수요 위축
20일(현지시각) 일본의 3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3.14%로 상승해 해당 국채가 발행된 199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40년 만기 국채 수익률도 3.61%로 사상 최고치로 올라서 다음 주 예정된 입찰을 앞두고 시장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잇다. 20년 국채 수익률은 이날 한 때 15베이시스포인트(1bp=0.01%) 급등한 2.555%를 기록하며 2000년 이후 25년 만에 최고치까지 올랐다. 통상 채권 수익률과 국채 가격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전문가들은 이날 20년물 국채 입찰에서 수요가 10여 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 투자자의 불안 심리를 자극하며 수익률 급등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이나도메 가쓰토시 스미토모 미쓰이 트러스트 자산운용 수석 전략가는 "20년물 입찰 결과가 예상보다도 훨씬 부진했다"며 "그동안 재정 확장에 대한 우려와 유동성 감소로 인해 30년물과 40년물을 중심으로 매도가 지속돼 왔지만, 이제는 20년물까지 시장 불안이 확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일본은행의 국채 매입 축소 움직임이 국채 수익률 급등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행은 2023년 8월부터 분기당 4,000억 엔(약 3조8,500억원)씩 국채 매입 규모를 단계적으로 축소해 왔으며 내년 3월까지 매입 규모를 절반 수준으로 감축할 계획이다. 이에 그동안 시장을 떠받쳐 왔던 보험사 등 일본 내 주요 기관투자자마저 국채 매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수급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전 세계적으로 재정 지출 확대에 대한 투자자의 경계심이 작용하면서 일본 장기물 국채 금리가 급등했다고 분석했다.
7월 日 참의원 선거 등 정치적 요인도 영향
일본의 정치적 불확실성도 국채 시장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핵심 요인으로 지목된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대미 관세 협상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데다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적자 국채 발행과 감세 논의가 이어지면서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확대했다. 특히 지난 19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참석한 시게루 총리가 '일본의 재정 여건이 그리스보다 심각하다'고 발언하면서 시장의 우려는 더욱 증폭됐다. 이미 높은 수준이던 일본의 국가 부채 문제에 대한 경계심이 총리의 발언으로 다시 한번 부각된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250%를 넘어서며 선진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는 2010년대 재정위기를 겪었던 그리스(당시 약 150%)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이런 배경에는 일본 고유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은행은 10년 넘게 이어진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양적 완화를 통한 대규모 부양책을 시행했고, 마이너스 금리 정책도 장기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런 기조는 지난해부터 점차 수정되기 시작했다. 일본은행은 2023년 3월 마이너스 금리를 종료하고 정책금리(당좌예금 잔고 금리)를 0~0.1%로 인상했으며, 2024년 7월과 2025년 1월에는 각각 0.25%, 0.5%로 추가 인상해 16년 3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 여파로 장기물 금리가 급등했고 지난 3월 17일 일본 30년 만기 국채 금리가 장중 연 2.638%까지 오르며 한국 30년물(고점 연 2.606%)을 추월했다. 이는 2016년 8월 이후 처음으로 한국과 일본의 초장기 국채 금리가 역전된 사례다.

시장선 블랙 먼데이 악몽 재현될까 우려
이런 가운데 일본의 초장기 국채 금리 상승세가 지속되면서 엔캐리 트레이드 자금의 청산 가능성이 시장의 새로운 리스크로 부상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일본 국채 금리 오름세가 지속될 경우 글로벌 자금 흐름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일본이 더 이상 '제로(0) 금리 국가'로 인식되지 않으면서,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의 매력도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달러·엔 환율 하락으로 엔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캐리 트레이드 청산 흐름에 더욱 불을 지피고 있다.
이미 시장은 지난해 한 차례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의 여파로 큰 충격을 받았다. 지난해 7월 말 일본은행이 예상보다 빠른 금리 인상 신호를 내놓자 그동안 저금리 엔화를 빌려 해외 고수익 자산에 투자했던 글로벌 자금이 대거 회수되는 현상이 촉발됐다. 주말이 지난 첫 거래일인 8월 5일, 일본 닛케이225지수는 12% 하락해 사상 두 번째로 큰 낙폭을 기록했고, 코스피·코스닥도 -8%에 달하는 하락세를 보였다. 미국 S&P500지수 역시 3% 하락하는 등, 아시아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증시가 일제히 폭락했다.
이 같은 우려 속에 전문가들은 일본은행의 양적 긴축(QT) 계획에 대한 재검토를 촉구하고 있다. 노린추킨 젠교렌 자산운용의 나가토모 료마 수석 펀드매니저는 "지금 같은 재정 리스크와 공급 과잉 상황에서는 초장기물 국채에 손대려 하지 않는다"며 "시장 신뢰를 회복하려면 당국이 분명한 대응을 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 재무성 역시 장기물 국채 발행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시장은 오늘 열리는 일본은행 6월 정책회의에서 국채 매입 축소 계획이 재조정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