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베리 체제' 앞세워 무역 질서 뒤엎는 美, 곳곳에서 부작용 속출
입력
수정
美, '턴베리 체제' 앞세워 국제 사회 질서 재편 착수 자국 고용 확대 노리고 둔 수, 오히려 역효과 발생 "무역 흑자 오히려 늘었다" 핵심 견제 상대 中도 '미소'

분업과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형성된 국제 사회의 질서가 전면적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자국 제조업 부흥과 중국 견제를 위해 강력한 관세 정책을 시행, 이른바 '턴베리 체제' 전환을 선언한 결과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미국의 행보가 오히려 미국의 고용을 위축시키고, 중국의 국제 사회 입지를 강화하는 등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美 "턴베리 체제 구축 순조로워"
4일 정계에 따르면, 지난달 미국 통상 정책을 총괄하는 제이미슨 그리어 미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미국의 새로운 무역 협정은 새로운 글로벌 무역 질서의 서막”이라며 “이제 세계무역기구(WTO)가 주도하는 세계 무역 질서는 불가능하다”고 발언했다. 이른바 ‘트럼프 라운드(각국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무역 협상)’가 1995년 출범해 30년간 유지된 기존의 WTO 다자무역 체제를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이 한국, 일본, 유럽연합(EU)과의 무역 협상에서 체결한 15% 상호 관세 및 거액의 대미(對美) 투자 관련 합의를 턴베리 체제라고 명명했다. 턴베리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지역 이름으로, 지난달 27일(이하 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무역 합의를 체결한 곳이다. 그는 “(턴베리 합의는) 공정하고, 균형적이며, 구체적인 국익에 부합하는 역사적 합의”라며 “트럼프 라운드가 시작된 지 채 130일이 안 됐고, 턴베리 체제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구축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트럼프 행정부가 대담한 처방을 내린 이유는 미국이 당면한 문제가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35%에 달하던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현재 10% 전후로 급락했으며, 이로 인해 미국이 끌어안은 무역 적자도 대폭 불어났다. 달러 패권에 기반한 자본 흑자가 무역 적자를 상쇄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 인상과 보복 위협을 통해 외국 시장 개방 및 외국 자본의 투자를 유도, 미 제조업을 재건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계획을 현실화하고 나섰다.
美 고용 시장의 이례적 균형
문제는 이 같은 미국 정부의 구상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고용은 최근 들어 꾸준히 위축되는 추세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7월 미국의 채용 공고(JOLTS)는 718만 명으로 감소했으며, 6월의 구인 공고도 736만 명으로 하향 조정됐다. 시장의 인력 수요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다. 지난 5~7월 월평균 일자리 증가 규모 또한 3만5,000개로 전년 동기 대비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채용이 둔화함과 동시에 해고 건수 역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노동부 자료를 살펴보면 지난달 17∼23일 기준 미국의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는 22만9,000건으로 한 주 전보다 5,000건 줄었다. 2주 이상 실업수당을 신청한 '계속 실업수당' 청구 건수는 8월 16일 기준 195만4,000건으로 일주일 전보다 7,000건 감소했다. 실업률 역시 기록적으로 낮은 수준인 4% 초반대에서 머무는 중이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이 같은 미국의 고용 시장 상황이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최근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이 주최한 연례 잭슨홀 경제 정책 심포지엄에서 "현재의 노동 시장은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수요와 공급 모두 둔화한 '특이한 균형' 상태"라며 "이러한 균형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낳거나, 갑작스러운 해고와 실업 증가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진단했다.

美 견제받은 中, 오히려 웃는다?
미국발(發) 관세 전쟁의 중심축에 서 있는 중국의 피해 역시 미미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은 관세 부과를 통해 중국산 제품의 경쟁력을 약화하고, 중국에서 제품을 생산하던 미국 기업의 리쇼어링(기업이 해외로 이전했던 생산 시설이나 사업을 다시 본국으로 되돌리는 현상)을 유도하고자 했다. 하지만 중국은 광대한 내수 시장, 탄탄한 제조업 기반, 풍부한 경제적 자원 등 미국에 대응할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만큼, 관세 압박에 쉽게 굴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대미 수출 중단이 중국 GDP에 미치는 영향은 3% 미만일 것으로 추산된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극단적인 통상 정책이 오히려 중국에 이득이 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6월 보도를 통해 관세 전쟁 발발 이후 중국의 대미 수출은 감소했지만, 전체 수출은 오히려 늘었다고 전했다. 실제 올해 1분기 중국은 2,730억 달러(약 380조6,440억원)의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이는 1분기 기준 역대 최고치다. 2분기 들어서는 흑자 폭이 3,142억 달러(약 438조890억원)로 한층 확대됐다.
이처럼 중국의 무역 수지가 눈에 띄게 개선된 것은 미국을 외면하고 중국과 손을 잡은 글로벌 사우스(남반구에 위치한 신흥국·개도국) 국가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국가별로 15~30%의 상호관세를 부과받은 아프리카가 대표적이다. 그웨데 만타셰 남아공 자원부 장관은 최근 “미국이 높은 관세를 부과한다면 우리는 대체 시장을 찾아야 한다”며 “우리의 가장 큰 무역 상대국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에 중국은 지난 6월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관세 부과를 중단하겠다고 밝히며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냈다.
동남아시아도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에 휘둘리는 추세다. 중국의 미국 수출 우회로로 지목됐던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은 미국으로부터 각각 19~20%의 관세를 부과받았다. 여기에 타국에서 출발해 동남아에서 환적된 대미 수출품에 대해선 추가 관세를 내야 한다. 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오히려 중국의 동남아 내 영향력을 키우는 발판이 되고 있다. 미 외교 전문 매체 포린어페어스는 “미국이 동남아에서 경제적으로 손을 떼는 것이 분명해진다면, 이들 국가는 절박함 속에 중국에 압도될 것”이라고 전했다.
인도 역시 미국의 고율 관세 압박을 이겨내기 위해 중국과 외교, 안보, 경제 등 부문에서 협업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왕이 중국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18일부터 20일까지 인도 델리를 공식 방문했으며, 이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도 8월 31일 중국 톈진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 회의에 참석했다. 2020년 6월 국경 분쟁 이후 줄곧 긴장 상태였던 양국 관계가 관세 전쟁을 계기로 개선의 실마리를 찾은 셈이다. 중국의 해양 팽창과 일대일로 전략을 저지해 왔던 인도가 이대로 중국의 편에 서게 될 경우, 미국은 막대한 외교 리스크를 떠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