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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엔 환율, 작년 8월 ‘블랙먼데이’ 수준 하회 글로벌 弱달러 심화, 대체 안전자산인 엔화 급부상 BOJ 금리인상·관세 불확실성, 엔화 강세 자극할 듯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상호관세 발표 이후 달러가 약세를 보이면서 글로벌 투자 자금이 엔화로 쏠리고 있다. 안전자산인 달러의 지위가 흔들리자 대체 투자자산인 엔화가 부상한 것이다. 최근에는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 가능성까지 더해지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달러·엔 142엔대로 ‘뚝’, 지난해 9월 이후 최저
21일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지난 18일 달러·엔 환율은 142엔대를 기록하며 작년 9월 이후 최저치를 나타냈다. 일본은행이 깜짝 금리 인상을 단행해 전 세계적으로 위험선호 심리가 급격히 위축됐던 작년 8월 초(146엔대)보다 낮은 수치로,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스러운 관세정책으로 달러가 약세를 보인 영향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일 무역 상대국을 대상으로 최소 10%, 최대 34%에 달하는 상호관세를 부과했는데, 단 하루 만에 중국을 제외한 57개국에 대한 관세 부과를 90일간 유예했다. 이후 일부 자동차 부품에 대한 관세도 유예하는 등 정책을 가파르게 선회하고 있다. 이에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지수는 같은 날 오후 3시 기준 99.40을 기록하면서 지난 11일부터 6거래일째 99선을 유지했다. 달러지수가 100을 밑돈 것은 지난 2022년 4월 이후 3년 만이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달러를 대체할 안전자산인 엔화로 눈을 돌리고 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에 따르면 엔화 투기적 순포지션은 지난 12일 기준 12만1,800계약 순매수를 기록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엔화 강세에 달러 등 기타통화 자산을 팔고 엔화를 매수한 투자자들이 늘어났다는 의미다.
BOJ의 정책 변화도 글로벌 투자자금 끌어모으고 있다. 우에다 가즈오 BOJ 총재는 최근 “현재 실질금리가 매우 낮다”며 금리 인상 가능성을 재차 시사했다. 시장은 일본은행이 오는 6~7월 중 추가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금리 인상은 통화가치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며, 엔화 강세를 더욱 자극한다.

‘엔 캐리 청산’ 악몽 재현 주의보
이에 시장에선 엔 캐리 청산 공포가 다시금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의 상호관세 탓에 미국 경기가 침체가 가속화되면 금리 인하를 자극할 수 있고 이와 맞물려 미·일 금리차가 축소되면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환경이 조성될 수 있어서다. 실제로 글로벌 투자자금이 일본으로 쏠릴 경우, 신흥국 금융시장에서 자금이 이탈할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해 8월 한국은행 국제국이 발표한 ‘엔 캐리 트레이드 수익률 변화와 청산 가능 규모 추정’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3월 말 기준 전체 엔 캐리 자금 잔액은 506조6,000억 엔(3조4,000억 달러·4,700조원)으로 추정됐다. 한은은 이 중 6.5%인 32조7,000억 엔(약 304조원)을 청산 가능 규모로 분석했었다. 만약 이 금액이 대거 청산된다면 신흥국 통화나 증시의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문홍철 DB증권 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금리와 함께 닛케이지수와 달러·엔 환율의 변동성도 제법 큰데, 이는 15년간 축적된 진정한 앤캐리 자금들이 포지션 변환을 트리거링 할 수 있다”며 “만약 그렇다면 지난해 7~8월의 엔숏페어트레이딩(엔화 약세 베팅)의 청산이 가져온 혼란과는 차원이 다른 중장기적인 자산 배분의 변화가 촉발될 수 있으므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엔 캐리 다음은 프랑 캐리?
다만 작년 8월에 불거졌던 예기치 못한 급락 사태, 이른바 ‘엔 캐리 청산발(發) 블랙먼데이’가 재현될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당시 엔화 강세를 예상하지 못했던 투자자들이 엔화를 급격히 매수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이 출렁였지만, 이번에는 시장이 적극적으로 엔화를 매수해 왔다는 점에서다.
달러 약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일본 기준금리가 선진국 중 최저 수준에서 벗어나면서 스위스 프랑을 캐리 트레이드 다음 타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CFTC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프랑을 매도하고 달러에 투자하는 캐리 트레이드 규모가 엔화를 제쳤다. 작년 11월 중순까지만 해도 엔화 매도 규모가 컸지만 12월부로 역전됐다.
스위스 중앙은행(SNB)은 지난달 20일 기준금리를 연 0.5%에서 연 0.25%로 내렸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낮아진 데 따른 것으로, 금리 인하는 다섯 차례 연속이다. 반면 BOJ는 지난해 3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17년 만에 금리를 올리며 8년간 이어진 ‘마이너스 금리’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고, 이후 순차적으로 금리를 올렸다. 현재 기준금리는 0.5% 수준으로, 일본 기준금리가 세계 최저를 탈피한 것은 스위스가 금리 인상 기조를 접은 2022년 9월 이후 처음이다.
그동안 일본의 낮은 금리는 엔 캐리 트레이드의 원천이었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금리 역전으로 외환시장에서 엔 캐리 트레이드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구치 게이이치 리소나홀딩스 수석전략가는 “캐리 거래의 조달 통화로 스위스 프랑이 선택되기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