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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발효 후 태평양 운임 20개월 만에 최저치 극동아시아-미국 구간 수입 수요 급감 '직격탄' 해운업계, 대서양 노선 확대하며 '공급망 재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 일본 등 주요국에 부과한 상호관세 조치와 대중국 관세 폭탄이 글로벌 해운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90일 간의 관세 유예 기간 동안 재고를 선점하려는 수입 업체들의 물량이 집중되며 운임이 급등했으나, 지난 9일 고율 관세가 본격 시행된 직후에는 아시아와 미국을 오가는 태평양 컨테이너 운임이 2023년 말 이후 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장기적으로 美·中간 물동량 60% 감소 전망
11일(현지 시각) 발틱해운거래소(Baltic Exchange)와 프레이토스(Freightos)에 따르면 극동아시아발 미국 서해안행 컨테이너 현물 운임은 전일 대비 207달러 하락한 FEU(40피트 컨테이너)당 1,941달러로 집계됐다. 한때 7,000달러 선에서 고공 행진하던 운임이 20개월 만에 2,000달러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이는 지난 9일부터 시행된 트럼프 대통령의 고강도 관세 정책의 영향으로, 비용 부담에 따른 수입 수요 위축이 하락세를 불렀다는 분석이다.
이달 초 극동아시아발 미국행 평균 스팟운임도 급락하며 2023년 12월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영국의 해운·물류 전문 컨설팅 기관 드류어리(Drewry)는 "일부 선사가 영업을 중단하면서 컨테이너 운임은 약 8주간 하락세를 지속했다"며 "이에 선사들은 운항을 대거 취소하면서 태평양 전역의 서비스를 줄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화물 수요 감소로 하반기 운임이 추가 하락하며 '홍해 위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운임 하락은 공급망 전반에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해운 선사들은 아시아발 미국 노선 운항 횟수를 15~30%가량 줄이며 빈 배를 거둬들이는 등 공급 조절에 착수했고, 일부 화주들은 높은 관세를 피하고자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로 생산기지를 옮기는 등 물류 경로 재편에 나섰다. 업계에서는 이번 운임 하락이 일시적인 충격을 넘어 장기적인 교역 위축으로 이어져 미·중 간 물동량이 최대 60%까지 감소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유예 기간 중에는 물량 몰려 운임 급등하기도
최근의 하락세와는 대조적으로 관세 부과 직전에는 해상 운임이 가파르게 치솟는 정반대 흐름이 전개됐다. 수입 업체들이 관세 부과 전에 재고를 선점하기 위해 대규모 선적에 나선 것이다. 특히 가전, 의류, 생활용품 등 소비재를 대량으로 들여오는 업체들이 관세로 인한 가격 인상과 이익 감소를 피하기 위해 앞다퉈 물량을 확보하면서 운송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관세 부과 전 한 달간은 평소보다 두세 배 많은 선적 예약이 몰려들어, 선복 확보 경쟁이 치열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지난 5월 14일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카자흐스탄,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등 주요 교역국을 대상으로 상호관세 부과를 90일간 유예한다고 발표하면서 더 고조됐다. 관세 유예 조치로 사실상 '시간적 완충 장치'가 마련되자 화주들 사이에서 이 기간 물량을 최대한 소화하려는 경쟁이 붙었다. 드류어리는 "유예 기간에 단기 계약과 긴급 운송 요청이 쏟아져 항만과 선사의 작업량이 급증했다"며 "해운업계는 이 시기를 ‘90일 레이스’라고 불렀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6월 초 기준으로 극동아시아발 미국 동해안행 운임은 FEU당 6,100달러를 기록하며 한 달 새 88% 급등했다. 같은 기간 미국 서해안행 운임도 67% 상승하며 5,082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흐름은 전 세계 물류 시장에 영향을 미쳐, 극동아시아에서 북유럽으로 향하는 운임도 2,704달러로 32% 상승했다. 당시 아시아·북유럽 항로 제공 선복량(4주 이동 평균 기준)은 34만6,000TEU(40피트 컨테이너)로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수송량 최고치마저 초과한 상황에서도 운임 상승세가 꺾이지 않았다.
태평양 노선 의존도 줄이고 신규 서비스 확대
트럼프발 관세 폭탄의 여파로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물동량과 운임이 요동치면서 해운업계 전반에 실적 악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는 '2025년 해운·조선업 동향 및 전망 보고서'에서 "올해 들어 글로벌 해운 시장은 공급 증가율이 수요 증가율을 웃도는 구조적 부담이 이어지고 있다"며 "공급 과잉과 수요 둔화의 불균형이 심화하고 운임 하락 압력이 커지면서 수익성 악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해운사들은 기존 주력 노선인 아시아-미주 노선 의존도를 줄이고, 인도·유럽 등 신규 항로 개척에 속도를 내고 있다. HMM은 올해 2월 대서양과 인도-유럽 구간에서 새 컨테이너 서비스를 시작했다. 특히 대서양을 횡단해 유럽과 미주 지역을 연결하는 TA1 서비스는 2018년 이후 7년 만에 재개된 항로로, 4,600TEU급 컨테이너선 10척을 투입해 영국·프랑스·네덜란드·독일·벨기에를 거쳐 남미 주요 항만을 기항하는 왕복 70일 운항 서비스다.
또 인도 시장 공략을 위해 인도와 북유럽을 잇는 INX 서비스도 신설했다.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출항해 인도 하지라·문드라·나바쉐바, 스리랑카 콜롬보, 영국 런던 게이트웨이, 네덜란드 로테르담, 독일 함부르크, 벨기에 앤트워프 등 주요 거점 항구를 연결하는 경로로, 총 11척의 6,000TEU급 컨테이너선이 투입된다. 이 외에도 아시아-남미 동해안을 오가는 IFL 서비스를 추가 개설해 태평양·인도양·대서양 등 주요 원양의 동서 항로를 모두 강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