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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 일정=리스크” 인식 확산
미분양 증가→자금 경색 악순환
대형 건설사 ‘선별적 공급’ 시대

올해 1분기 전국 아파트 분양 물량이 16년 만에 가장 적은 수준을 기록한 것으로 파악됐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지속되며 많은 건설업체가 분양 일정을 조율하는 모습이다. 특히 중소 건설업체들의 경우, 자금 경색을 이유로 착공 후 공사가 중단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어 이 같은 분양 가뭄은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분양률·계약률 모두 급감
18일 부동산 정보분석기관 부동산R114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전국 일반분양 물량은 총 1만2,358가구로 2009년 1분기(5,682가구) 이후 16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1년 전인 지난해 1분기(3만5,215가구)와 비교하면 3분의 1에 가까운 수치다. 월별 분양 물량은 △1월 5,974가구 △2월 2,371가구 △3월 4,040가구다.
수도권 분양 물량도 큰 감소세를 그렸다. 1분기 경기도 총 분양 물량은 1,179가구에 그쳤다. 특히 3월엔 65가구 분양에 그치며 13년 만에 최저치를 찍었다. 서울의 경우, 2월 482가구를 분양한 게 전부다. 분양 실적률 또한 부진했다. 1분기 서울의 분양 실적률은 17.6%를 기록했으며, 경기는 17.4%, 인천은 9.3%의 성적표를 받았다. 1분기 분양에 나선 아파트 10곳 중 8곳이 넘는 단지가 수분양자를 만나지 못한 셈이다.
겉으로 보기엔 청약 수요가 줄어든 것 같지만, 실상은 공급자들이 먼저 손을 뗀 상태에 가깝다. 지난해 기준 전국 100대 건설사 중 무려 25곳이 적자 상태에 놓여 있는 데다, 이 가운데 일부 기업의 부채비율은 400%를 넘어서는 등 부담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익이 불투명한 주택 공급을 무리하게 추진할 필요가 없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예전처럼 “일단 땅 사서 설계부터 하자”는 전략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분양 승인이 떨어진다 해도, 사업성이 안 나오면 착공을 포기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착공유보형 미분양’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김창수 나이스신용평가 연구원은 “경기 침체 장기화에 따른 금융비용 부담과 사업성 저하로 많은 사업장이 착공 전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잠재 수요가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공급 의지가 실종된 구조적 병목 상태에 가까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울며 겨자 먹기식 분양, 미분양 폭탄으로
현재 일부 지역에서 진행 중인 신규 분양 또한 상황이 좋지 않다. 이들 단지는 이미 착공에 들어갔거나, 중단하기엔 리스크가 더 큰 상황에서 더는 분양 일정을 미룰 수 없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건설사 입장에서는 시장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늦출수록 금융비용이 커지고 상황이 나아질 것이란 확신도 없는 만큼 ‘그래도 한 번 던져보자’는 식의 분양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규모 미분양과 더 커진 재무 부담이다. 공급자들이 어쩔 수 없이 내놓은 물량에 시장이 별다른 반응을 내보이지 않으면서 지방이나 비선호 입지에서는 아예 ‘청약 제로’에 가까운 사태까지 속출하고 있다. 여기에 대출 여건까지 악화하면서 수요자들의 발길은 완전히 끊긴 상태다.
이렇게 발생한 미분양 물량은 건설사에 치명적인 부채로 돌아온다. 분양에 실패하면 예상 수익은 사라지고, 이미 투입된 자금만 남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성 평가에 고삐를 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번의 실패가 다음 프로젝트의 발목을 잡고, 이는 기업 전체의 유동성 위기는 물론 해당 기업에 자금을 조달한 금융기관으로 위험이 전이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금융당국의 판단이다.
현재 금융당국은 저축은행에 오는 6월 말까지 부실 사업장을 정리하라고 통보한 상태다. 상반기까지 정리하지 못한 부실 사업장에 대해서는 현장 점검을 벌인 뒤 해당 기관과 임직원에 대한 제재를 부과할 방안 또한 검토하고 있다. 이에 적기시정조치를 받는 금융기관이 속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앞서 금융감독원은 상상인저축은행에 적기시정조치 중 가장 낮은 단계인 ‘경영개선권고’를 부과한 바 있다. 저축은행이 적기시정조치를 받은 것은 지난 2012년 저축은행 사태 이후 13년 만이다.
PF 막히자, “팔릴 곳만 짓는다”
그간 중소형 건설사들이 주로 의존해 왔던 저축은행·상호금융권의 PF 대출이 사실상 막히면서 자금 경색도 심화하는 모양새다. 통상 건설사업은 땅을 매입하고 설계를 진행한 뒤, 향후 분양 수익을 담보로 자금을 끌어오는 구조로 전개된다. 그러나 지금처럼 분양 전망이 어두울 땐 금융기관에서도 자금 융통에 따르는 리스크를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에 업계에서는 “PF 대출 실종 사태”라는 볼멘소리까지 나온다.
이 같은 자금 경색은 중소형 건설사에 더 큰 치명타로 다가온다. 자체 자본으로 사업을 진행할 여력이 부족한 이들 건설사는 PF가 끊기는 순간 사업 자체가 중단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공정률 30~40% 수준에서 멈춰 선 현장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고, 미착공 분양 예정지도 줄줄이 사업 철회에 들어가는 상황이다. 이를 두고 한 건설사 관계자는 “분양 여부를 고민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일부 대형 건설사가 자본 여력을 앞세워 여전히 사업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 범위는 제한적이다. 수도권 역세권, 고급 브랜드, 수요 확정 가능성 등 일정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아예 입찰 자체를 하지 않는 식이다. 다시 말해 ‘돈 되는 사업’에만 나서고, 나머지 지역과 사업지는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다. 갈수록 심화하는 분양 가뭄은 단순한 공급 부족이 아닌, 시장 전체가 수익성 기반 생존 전략으로 재편된 결과라는 분석이 힘을 얻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