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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 3개월 만에 0.4%p 낮춰 "세계적으로 성장률 낮은데 우리만 성장할 순 없어" 신산업 육성하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 유입도 미진

한국은행이 올해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기존 1.9%에서 1.5%로 하향 조정했다. 내수와 수출의 동반 부진이 심화하면서 성장 둔화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라 3개월 만에 당초 전망치를 큰 폭으로 낮춘 것이다.다만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1.8% 수준을 유지했다. 이와 관련해 이창용 한은 총재는 1.8% 수준의 성장률이 한국 경제의 현실적인 역량임을 강조하며 구조개혁 없이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어렵다고 지적했다.
올해 내수 부진과 수출 둔화로 1.5% 성장 전망
25일 이 총재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연 3.00%에서 2.75%로 인하한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 1.5%는 상당히 뉴트럴한(중립적인) 수준이라고 생각한다"며 "향후 상·하방 요인이 모두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날 한은은 수정 경제전망을 통해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9%에서 1.5%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 내수 부진과 수출 둔화가 예상보다 심각해지면서 소비 증가율 전망치는 지난해 11월 제시한 2.0%에서 1.4%로, 수출 증가율 전망치는 1.5%에서 0.9%로 낮춰 잡았다.
이에 대해 이 총재는 "지난달에는 계엄 사태 등 국내 상황이 영향을 미쳤고 이번 달 전망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후 관세 정책의 불확실성 확대가 영향을 미쳤다"며 "1월에는 미국의 대중국 관세가 2분기 이후 부과되고 다른 국가들은 내년에 관세가 부과될 것으로 가정했으나, 현재는 관세 부과 시기가 앞당겨지고 관세율도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재정 정책의 영향에 관해서는 "추가경정예산이 발표되지 않아 이번 전망에 반영하지 못했다"며 "추후 추경이 집행되면 성장에 상방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통화·재정정책으로 성장률 끌어올리는 데 한계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8%로 유지한 데 대해서는 "과거 고도성장에 너무 익숙해져 성장률 1.8%를 위기라고 하는데 저는 '1.8% 성장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실력이 그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계적으로 성장률이 낮은데 우리 혼자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게 우리의 실력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한국 경제의 역량과 체질 개선 없이 통화·재정정책으로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이날 이 총재는 작심한 듯 "그동안 우리는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산업을 키우지 않았고 구조조정 없이 기존 산업에만 의존해 왔다"며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신성장동력을 키우지 않고 해외 노동자도 데려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1.8% 이상으로 성장하려면 재정을 동원하고 금리를 낮춰야 하는데 그러면 가계부채가 늘고 재정에도 문제가 생겨 나라 전체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며 "더 높이 성장하려면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게 제가 계속해서 드리는 메시지"라고 덧붙였다.
정부를 향해서는 "지난 10년 동안 새로운 산업을 도입하지 않은 점을 뼈아프게 느껴야 한다"며 "창조적 파괴는 누군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사회적 갈등을 감내하기 어려워 피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금리로 모든 경기 문제를 해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올해 1.5% 이상 성장하려면 재정정책과 공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재정정책이 없다고 해서 금리를 더 낮추게 되면 환율과 물가, 가계부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금융 안정 기조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中에 추월당한 韓, 반도체 등 성장엔진 꺼져가"
이 총재의 발언에 앞서 한은 차원에서도 이미 한국 경제의 성장을 위해 구조개혁이 시급하다고 경고한 바 있다. 지난해 12월 한은은 'BOK이슈노트: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과 전망'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2025~2029년 1.8%에서 지속적으로 하락해 2045~2049년 0.6%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보고서에서 한은은 "잠재성장률을 높이려면 경제 전반의 구조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며 "노동시장 비효율성을 개선하고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유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해외에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강의 기적'이 끝났다는 뼈아픈 지적도 나왔다. 지난해 4월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한국 경제의 기적은 끝났나'라는 제목의 기획 기사를 게재했다. FT는 "국가 주도 자본주의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첨단 제조 대기업을 육성한 한강의 기적이 이제는 수명을 다했다"며 "과거 성공 방식에 얽매여 낡은 경제성장 모델을 답습하는 동안 한국 경제의 저력이 약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6·25 전쟁 이후 70년 만에 가난했던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만든 성장 엔진이 꺼져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FT는 "이젠 중국 기업들이 첨단 반도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을 따라잡았고, 과거 고객사 또는 하청업체던 중국 기업들이 이젠 한국 기업의 경쟁자가 됐다"며 "한국 정부가 과거처럼 제조 대기업 중심의 경제 모델을 고집하면서 기존 성장 방식을 개혁하거나 신성장 모델을 찾으려는 데는 무능함을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인구구조가 붕괴하는 상황에서 연금·주택·의료·노동 등 사회 전반의 구조개혁이 지연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