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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PE 중심 세컨더리 거래 반복
잘못된 학습효과에 시장 왜곡 심화
조 단위 대형딜 실종, 중형 거래만 활기

한국 인수합병(M&A) 시장이 실수요자 없이 자본만 순환되는 구조에 갇힌 모습이다. 실질적 인수 주체가 사라진 시장에서는 소수의 투자자가 특정 매물을 주고받는 세컨더리 거래만 반복되고 있으며, 기업 성장보다는 투자금 회수에 집중하는 기형적 생태계가 고착한 지 오래다. 글로벌·국내 자본 모두 중형 매물만 추적하는 가운데, 자본의 편향된 흐름이 산업 전반의 역동성을 저해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지분 전환’ 가까운 거래 속출
6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 M&A 시장에서는 사모펀드(PE)가 팔고 PE가 사는, 이른바 ‘세컨더리 딜’이 하나의 공식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는 PE 간 지분을 되팔며 수익을 실현하는 구조로, 실질적으로 매각 대상 회사를 인수할 실수요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각한 시장 왜곡을 초래한다. 외형적으로 활발히 전개되는 M&A 시장의 이면에서는 회수 구조만 간신히 유지되는 기형적 생태계가 고착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현상은 실수요 기업의 부재에서 비롯된 결과다. 최근 국내 시장은 대기업들이 M&A를 통해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찾아보기 힘들고, 전략적 인수를 통해 기업 가치를 키우려는 움직임도 미미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M&A 시장의 거래 구조 또한 자산 매각보다는 투자자의 자금 회수를 목적으로 이뤄지며, 인수 또는 합병이 아닌 ‘지분 전환’에 가까운 거래가 빈번하다. 이는 기업의 장기석 성장보다 단기 회수에 집중하는 투자 문화로 이어지는 형국이다.
세컨더리 중심의 거래가 반복되면서 기업의 가치 판단 기준도 흔들리는 모습이다. 본질적 경쟁력이나 성장 잠재력보다는 과거 거래 기준에 의존한 가치 책정이 이뤄지면서 실제 자산 가치와 거래 가치 간 괴리가 발생하는 구조다. 이러한 거래는 가격 왜곡과 시장 혼란으로 이어지고, 종국엔 자산의 실제 잠재력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는 상황을 낳는다. 이 때문에 투자가 아닌 투기성 회수 시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험성마저 제기된다.
결과적으로 세컨더리 딜의 성행은 한국 M&A 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상징적 현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처럼 일부 투자자 사이에서만 자산이 회전하는 폐쇄적 구조는 산업적 융합과 전략적 확장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고, 나아가 건강한 투자 생태계 형성을 가로막는다. M&A가 기업 성장의 동력이 아닌 회수 수단에 그치는 한, 한국 자본시장은 구조적 활력을 되찾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견해다.
시장 전반 경험 부족, 전략적 인수에 소극적
한국에서 M&A가 정착하지 못한 배경에는 기업 내부의 인식 부족과 반복된 실패의 학습효과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매각을 추진하는 기업 가운데 상당수가 가치 산정과 실사 대응, 조직 통합 등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지 않은 채 시장에 나오는데, 이는 M&A 자체를 전략이 아닌 탈출구로 인식하는 분위기에서 비롯된다. 체계적 준비 없이 흥정부터 시도하는 매물이 넘치고, 거래의 신뢰도와 성공 가능성 모두 낮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인수 측의 태도 또한 문제다. 많은 기업이 전략적 시너지보다는 단기적인 비용 절감이나 ‘저가 매수’에 초점을 두고 거래에 접근한다. 이는 실질적 기술력이나 인력 구성, 시장 확장 가능성에 대한 분석보다 ‘가격부터 깎고 보는’ 관행으로 굳어진다.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 기대에 못 미치는 조건만 주고받다 협상이 결렬되는 사례가 반복된다.
드물게 거래가 성사되더라도 문제는 계속된다. 인수 이후 통합(Post Merger Integration·PMI)에 대한 이해와 준비가 부족해 실질적 통합 효과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주를 이루는 탓이다. 조직 문화와 시스템, 사업 구조를 하나로 엮는 작업 없이 단순히 소유권만 바뀐 상태로 방치되면서 통합으로 기대했던 시너지 창출은 요원해지고, 심지어 기존 역량마저 소실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M&A를 하나의 변화 관리 프로세스로 접근하기보다는 ‘계약 완료’에만 치중한 데 따른 필연적 결과다.
이러한 실패가 누적되면서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는 M&A 자체를 회피하는 경향도 뚜렷해지는 양상이다. 한 번 실패한 경험이 다음 시도를 차단하고, 비슷한 흐름이 반복되면서 시장 전체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산업계 전반의 유연한 협력과 역동적인 자본 흐름은 가로막히고, M&A 시장 또한 점점 더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구조로 고착하고 있다.

결국 PE는 ‘팔 수 있는 기업’에 접근
국내외 PE 운용사들이 조 단위 대형 거래를 꺼리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시장에 매력적인 인수 대상이 많지 않은 데다, 거래 이후 자금 회수가 원활할지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과거 대규모 거래를 검토했던 칼라일그룹이나 KJ환경을 인수한 EQT파트너스 등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글로벌 PE들은 한국 시장을 조심스럽게 관망하는 분위기다. 이는 규모 자체보다는 회수 가능성 중심으로 투자 전략이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로벌 하우스들도 당장의 거래 규모보다는 유연한 수익 구조 확보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KKR은 전통적인 PE 영역 외에도 크레딧, 인프라 등 다양한 투자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있으며, HD현대마린솔루션의 소수 지분에 수천억 원을 투자해 성과를 올렸다. 이를 통해 반드시 지분 100% 인수가 아니어도 유의미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TPG 역시 지속적으로 조 단위 거래 제안을 받고 있지만, 실제 성사된 거래는 녹수(바닥재), 삼화(화장품 용기) 등 3,000억원 안팎의 중간 규모에 집중됐다.
또 블랙스톤은 지난해 절삭공구업체 제이제이툴스(옛 장진공구)를 약 3,100억원에 인수했고, 베인캐피탈은 고려아연 자사주 매입에 약 4,000억원을 투입해 담보와 수익률을 확보한 바 있다. CVC캐피탈은 파마리서치와 스타비전 등에 각각 2,000억원, 3,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했다. 이처럼 실현 가능성과 수익 구조가 명확한 중형 딜에 거래가 집중되는 추세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투자 흐름은 소수의 매물에 다수의 자본이 집중되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한 M&A 자문사 관계자는 “국내외 할 것 없이 PE들은 중형 거래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것”이라며 “자문사 사이에서도 매각 자문을 따내기 위해 무리한 가격을 받아주겠다 제시하는 사례가 빈번한 실정”이라고 업계 분위기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