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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만원짜리 4만원에 내놔도 안 팔려 럭셔리 브랜드 '차이나 리스크'에 흔들 中 명품 소비 끝났나, 브랜드 가치 뚝

‘고가품은 오늘 사는 게 가장 싸다’는 불문율이 중국에서 옛말이 됐다. 한때 없어서 못 판다던 고가품들은 이제 중고 시장에서조차 눈물의 할인 판매에 내몰렸다. 부동산 침체와 소득 감소로 이중고를 겪는 중국 중산층이 사치품 소비를 급격히 줄이자 나타난 현상이다. 다만 이는 단순한 소비 위축을 넘어 판매 전략 실패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간 명품 업체들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소비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매출 확대 일변도 전략을 구사해 왔으나, 장기적으로 명품 브랜드 가치를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분석이다.
명품업체, 90% ‘눈물의 할인’
10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은 중국 베이징의 한 대형 중고 고가품 매장 풍경을 전하며 “중국 경제를 뒤덮은 경기 침체 그림자가 고가품 제국 심장부까지 파고들었다”고 보도했다. 이 매장 진열대에는 미국 매스티지(Masstige·대중적인 고가품) 브랜드 코치의 크리스티 핸드백이 219위안(약 4만2,000원)짜리 가격표를 달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당 제품은 원래 3,260위안(약 61만원)이었다.
프랑스 고가품 지방시의 2,200위안(약 41만원)짜리 G큐브 목걸이는 187위안(약 3만5,000원)에 불과했다. 93%에 달하는 할인율이다. 기존 고가품 업계 표준 할인율은 30~40%였다. 90%가 넘는 할인율은 사실상 ‘땡처리’에 가까운 파격적인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판매는 지지부진하다.
사치품 소비자들이 중고품으로 눈을 돌리면서 한동안 중국의 중고 시장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소비보다 공급이 우세하는 상황에서 성장세를 이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로이터통신은 2023년 중국 중고 명품 시장이 20% 성장했다는 즈엔컨설팅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중고 시장 성장은 소비가 아닌 공급이 증가한 탓이라고 분석했다.
中 수요 둔화에 타격
당초 중국은 세계 주요 명품 소비국 중 하나였다. 한때 세계 고가품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성장을 이끌었다. 컨설팅회사 베인앤컴퍼니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21년까지 중국의 명품시장은 4배 이상 급성장해 660억 달러(약 90조9,700억원) 규모로 커졌다. 이는 전 세계 고가품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규모다. 이에 유럽의 명품업체들은 급팽창하는 중국의 소비 시장을 등에 업고 몸집을 불려 왔다.
하지만 최근 중국 명품 매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찬 바람만 불고 있다. 경기 침체 조짐이 뚜렷해지면서 중국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아걸었기 때문이다. 2022년 들어 중국 내 코로나19 재확산으로 베이징·상하이 등 대도시 봉쇄가 장기간 이어졌고 이후 ‘위드 코로나’ 정책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경기 둔화, 실업률 상승 등으로 소비 심리가 살아나지 않았다.
실제 중국 가정은 자산 가운데 70%가 부동산에 묶여 있는데, 수년간 이어진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중국 중산층 자산은 공중분해 됐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중국 집값이 5% 하락할 때마다 가계 자산이 최대 2조7,000억 달러(약 3,700조원)씩 증발한다고 추산했다. 청년 실업률은 15%를 웃돈다.
주머니가 가벼워진 소비자들은 호황기에 구매했던 고가품을 중고 시장에 줄지어 내놨다. 시장조사업체 다쉬에컨설팅에 따르면 올해 중고 고가품을 팔려는 사람은 지난해보다 30% 늘었다. 엔위, 페이유, 폰후 같은 새 중고 고가품 거래 플랫폼도 범람했다. 하지만 구매자 수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다.

독이 된 판매 확대 전략
이는 지난 10여년간 중국몽에 취했던 명품 기업에 있어 최악의 시나리오다. 중고 시장에 쏟아져 나온 제품이 브랜드 이미지 추락을 가속화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명품은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는 폐쇄적 상징체계였다. 그러나 오늘날 명품은 대중 소비재로 진화했고, 누구나 들 수 있는 명품 가방은 더 이상 '명품’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이 같은 현상은 특히 합리적인 가격의 매스티지 브랜드에서 두드러진다. 명품 브랜드들을 세그먼트(segment)별로 구분하면 가장 아래에 다가가기 쉬운(accessible) 명품, 중간 단계에는 열망하는(aspirational) 명품, 제일 높은 단계엔 절대적인(absolute) 명품이 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매스티지 트렌드의 확산과 명품 할인 유통 채널의 등장으로 인해 명품의 개념이 희석되고 있다. 앞서 언급된 코치 핸드백이 4만원이란 파격적 가격에도 진열대에 남아있는 이유다.
이들 매스티지 브랜드는 수년간 매출 확대를 위해 리미티드 에디션 남발, 과도한 로고플레이, 중국 시장 내 오프라인 진출 확대 등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브랜드 훼손이었다. 여기에 중고 시장의 확장은 결정타로 작용했다. 한때 300만원을 호가하던 제품이 30만원에 거래되는 등 브랜드가 부여한 프리미엄이 시장가치 앞에 무너지고 있다. 가격의 고정성보다 이미지의 신뢰도가 먼저 무너진 것이다.
반면 에르메스는 '버킨백'과 같이 희소성을 강조한 고가 마케팅으로, 불황에도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에르메스가 부유한 고객에게 집중한 결과 경쟁사와 차이를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팬데믹 기간 적극적인 마케팅과 새로운 엔트리(입문) 제품으로 고객층을 넓히는 데 집중한 기업들과 달리 에르메스는 기존의 좁은 고객층을 겨냥해 이들에게서 꾸준한 수요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실제 에르메스는 중국 시장에서도 판매가 위축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구매 이력이 있는 사람 위주로만 제품을 판매하는 기조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