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영역 노리는 리플, ‘커스터디 솔루션’ 글로벌 확장 박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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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 글로벌 커스터디 사업 확장 중세 은행식 수탁 모델 재현 RLUSD 결제 인프라 구축 본격화

가상자산 시가총액 기준 세계 3위 XRP 발행사 리플이 한국에서 가상자산 커스터디(수탁) 사업을 준비한다. 커스터디 사업을 통해 은행적 기능을 흡수하는 동시에, 리플의 새로운 스테이블코인인 RLUSD를 활용한 실거래 검증까지 추진하며 금융 질서 내 위상을 확장하겠다는 포부다. 단순 토큰 발행에서 벗어나 자산 보관과 결제라는 핵심 기능을 흡수하는 전략은 리플이 제도권 금융의 심장부로 진입하려는 본격적 행보로 평가된다.
한국 시장 담당자 뽑고 파트너십 확장
12일 가상자산업계에 따르면 리플은 이달 초 한국 시장을 총괄할 담당자를 선임했으며, 한국에서의 커스터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리플은 한국에서 가상자산 사업을 하기 위해 금융 당국에서 부여하는 국내 가상자산사업자(VASP) 라이선스가 없기 때문에 VASP를 받은 국내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고 자사의 솔루션을 공급하는 방식을 계획 중이다. 최근 리플은 국내 커스터디 업체 비댁스, 다날의 블록체인 자회사 다날핀테크 등과 파트너십을 맺기도 했다.
이와 함께 리플은 21일 서울 코엑스에서 리플 생태계 확장 계획을 다룰 XRP·웹3 콘퍼런스 ‘XRP Seoul 2025’도 개최한다. 또한 25일 코리아블록체인위크에서는 RLUSD을 실제 가맹점 결제 프로세스에 적용해 직접 RLUSD를 통한 결제를 경험할 수 있는 이벤트도 기획했다. 스테이블코인의 실제 활용 가능성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증명하는 사례가 될 것이라는 게 업체 측의 설명이다.
리플은 한국뿐 아니라 스페인 대형 은행 BBVA와 파트너십을 체결하며 유럽 내 커스터디 사업도 가속화하고 있다. 총자산 7,160억 유로(약 1,165조원)를 보유한 BBVA는 30개국 이상에서 사업을 운영하며 매년 2,000억 유로(약 325조원) 이상의 국경 간 결제를 처리하는 거대 은행이다. 리플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BBVA는 리플이 메타코(Metaco)를 인수한 후 개발된 기관용 플랫폼인 리플 커스터디(Ripple Custody)를 통합할 예정이다. 이 기술을 통해 BBVA는 스페인 내 소매 고객에게 유럽연합의 암호화폐 시장(MiCA) 프레임워크를 완벽하게 준수하는 규제된 암호화폐 거래 및 수탁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이밖에도 리플은 스위스,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싱가포르, 홍콩 등 금융 시장에서 커스터디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중세 은행의 '금 수탁' 방식과 유사
커스터디 서비스란 고객의 디지털 자산을 보관 및 관리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 서비스업으로, 과거 중세 은행들이 보관료를 받고 자산을 수탁했던 방식과 유사하다. 11세기 이탈리아의 환전상들은 각 도시마다 달랐던 금화·은화의 가치를 식별할 수 있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금융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단순 환전에 머물지 않고 금을 보관해 주고 증서를 발행했으며, 예치금을 기반으로 대출을 실행해 이자를 취득하는 방식으로 은행 기능을 발전시켰다. 특히 보관한 금 이상으로 증서를 발행하는 관행은 이윤을 극대화했고, 상인·귀족·왕족까지 은행을 이용하는 금융 질서를 구축했다. 현존하는 은행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이탈리아 몬테 데이 파스키 디 시에나 은행(Monte dei Paschi di Siena, 1472년 설립)은 이 같은 전통의 산물이다.
리플은 가상자산을 투자자가 직접 보관할 경우 가상자산 지갑 보안키(Private Key)를 도난당하거나 분실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 착안해 커스터디 서비스에 뛰어들었다. 커스터디 서비스 수요는 대부분 대량의 가상자산을 운용하고자 하는 법인 투자자로부터 나온다. 현재는 비영리 법인을 제외한 일반 법인이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을 매수하더라도 법인 실명계좌가 막혀 있어 화폐로 환수할 방법이 없다. 이에 리플은 자사 커스터디 솔루션을 강화하고 전 세계에 판매하고 있다. XRP 토큰 세일과 별개로 캐시카우를 키우는 셈이다.
리플은 핀테크와 가상자산업계에 '은행 수준'의 수탁 기술을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해당 솔루션은 세계 주요 은행과 금융기관이 신뢰하는 보안과 규정 준수 표준을 따르면서 XRP 레저(XRPL)와 연동해 실물자산(RWA) 및 다양한 자산을 토큰화하고, 디지털 자산의 발행·이전·거래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리플의 이러한 시도는 금 보관에서 출발해 대출·투자로 진화하는 전통 금융과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美 은행 도전장, 금융 본진 침투
리플이 미국에서 은행 인가를 신청한 사실도 금융업의 본질적 지위를 노리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지난 7월 리플은 미국 통화감독청(OCC)에 트러스트 뱅크 인가를 신청했다. 해당 인가를 얻으면 대출이나 예금은 불가능하지만, 자산 보관과 결제 처리 등 한정된 은행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이는 일반 상업은행이 아닌 목적 제한형 B2B(기업 간 거래) 금융 기관에 해당한다.
리플은 이를 위해 신규 법인 '리플 내셔널 트러스트 뱅크(Ripple National Trust Bank)'를 설립할 계획이며, 본사는 뉴욕에 자리잡게 된다. 리플이 OCC에 제출한 계획서에는 리플랩스가 해당 은행을 100% 소유하며, 조직은 5인 이사회를 기반으로 운영된다고 명시됐다. 리플 내셔널 트러스트 뱅크는 RLUSD의 준비금 관리, 수탁 서비스 및 기타 결제 관련 업무를 수행할 예정이다. RLUSD는 미 달러 연동형 스테이블코인으로, 리플의 기업 기반 결제 네트워크와의 통합이 가시화되고 있다.
리플은 이와 함께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마스터 계좌 개설도 따로 신청한 상태다. 이 계정이 승인될 경우 리플은 중앙은행 시스템에 직접 접근해 스테이블코인 준비금을 보관하거나 결제를 처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돼, 기존 금융기관을 거치지 않고도 트랜잭션을 운영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리플의 결제 인프라가 한층 독립성과 효율성을 확보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가다.
암호화폐 기업으로는 앞서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서클(Circle)도 동일한 은행 인가 절차를 추진한 바 있어, 리플의 행보는 블록체인 결제 시스템의 제도권 진입이 본격화되는 신호탄으로 여겨진다. 금융당국의 허가 여부에 따라 미국 내에서 독립적인 금융기관으로서 암호화 자산을 보다 유연하게 운용하고, 글로벌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정통 금융 못지않은 신뢰성과 확장성을 갖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국 리플의 최종 목표가 은행을 겨냥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