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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일업계 흔드는 트럼프 관세 투자 위축·생산 감소에 위기 고조 내년 美 원유 생산량 1.1% 감소 예상

미국을 글로벌 에너지 강국으로 도약시킨 ‘셰일 혁명’ 이후 10년간 이어진 에너지 호황이 끝나간다는 경고가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촉발한 관세전쟁에 따른 경기 둔화 우려로 세계 원유 수요가 위축되고 있는 데다, 고율 관세로 시추 장비 등 가격이 오르자 셰일업체들이 생산을 줄일 조짐을 보이고 있어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화석연료 산업을 부흥시켜 미국의 에너지 패권을 되찾겠다고 공언해 왔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는 양상이다.
美 셰일업계 ‘긴축 모드’ 돌입
26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 셰일업계에서 '10년간의 셰일 붐이 끝났다'는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제유가 하락으로 수익성이 악화되자 미국 원유 생산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는 셰일 기업들이 시추 장비 가동을 멈추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글로벌 에너지 리서치회사 에너버스에 따르면 셰브런은 전 세계 직원의 15~20%를 감축하는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또 엑손모빌과 셰브런을 제외한 상위 20대 미국 셰일유 생산업체들은 올해 설비투자 예산을 1조8,000억 달러(약 2,464조원) 줄인다는 계획이다. 덴버에 있는 SM에너지의 허버트 보겔 CEO는 최근 한 콘퍼런스에서 "지금의 슬로건은 '버텨라'다"라고 말하며 업계의 위기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기업들의 시추 활동도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유전 서비스업체 베이커휴즈에 따르면 지난주 미국 내 시추 장치 수는 553개로 전주 대비 10개, 1년 전보다 26개 감소했다. 텍사스주의 시추 장비 가동 대수는 코로나19 팬데믹 직후 수준까지 떨어진 상태다. 이 같은 여파는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인사도 피하지 못하고 있다.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 창업한 미국 2위 프래킹 전문기업 리버티에너지는 라이트 장관이 트럼프 행정부에 입각한 이후 시가총액이 절반 가까이 하락했다.
에너지 및 원자재 정보 제공업체인 S&P글로벌커머디티인사이트는 내년 미국 석유 생산량이 하루 1,330만 배럴로 1.1% 감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전망이 현실화된다면 코로나19 팬데믹 충격이 있었던 2020년을 제외하고 1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에서 원유 생산이 줄어들게 된다.

관세 인플레·유가 하락 직격탄
당초 트럼프 대통령은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을 외치며 화석연료 생산을 늘려 미국의 에너지 패권을 강화한단 구상이었다. 이는 미국 셰일업계가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 기반 중 하나로 작동했던 이유기도 하다. 지난해 대선에서 석유·가스 기업들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기부한 금액만 7,500만 달러(약 1,024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은 정반대의 효과를 내고 있는 형세다. 관세 폭탄으로 인해 철강과 알루미늄 가격이 상승하면서, 유정을 시추하는 데 가장 큰 비용이 드는 장비인 케이싱 가격이 1분기에만 10% 급등했다.
치솟는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선 국제유가가 받쳐줘야 하지만 유가는 관세로 인한 경기 둔화 우려로 내림세다. 뉴욕상업거래소에 따르면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3개월 만에 배럴당 65달러 이하로 고꾸라졌다. 26일 기준 WTI 가격은 배럴당 61.53달러로, 연중 고점(1월 15일) 대비 23% 급락한 수준이다. 통상 셰일 기업이 생산비, 운영비, 이자 비용 등을 감당하려면 배럴당 최소 65달러의 유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최근 유가는 이 손익분기점을 꾸준히 밑돌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공개적으로 낮은 유가를 요구한 것도 자충수가 됐다. OPEC과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 연합체인 OPEC+는 지난달부터 감산량을 점진적으로 줄인 데다 최근 당초 계획보다 증산 속도를 빠르게 높이고 있다. 빌 파렌 프라이스 옥스퍼드에너지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은 에너지 가격을 떨어뜨리는 것을 고율 관세 정책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을 상쇄하는 수단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셰일 혁명’ 정점론 확산
전문가들은 생산량 감소가 셰일업계 성장세의 끝을 의미한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 에너지 산업은 셰일 혁명을 통해 값싼 석유와 가스를 지속적으로 대량 생산하며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수출을 통해 미국의 무역수지 개선에도 기여했다. 또 셰일유 덕에 미국은 해외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 미국은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 같은 석유 수출국들에 제재를 가할 정책적 자유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가가 배럴당 50달러까지 떨어질 경우 미국 생산량은 하루 30만 배럴 더 줄어들 수 있는 상황이다.
미국을 세계 최대 산유국 지위에 올려놨던 셰일 붐이 꺾이게 되면 글로벌 원유 시장 패권은 다시 중동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실제 셰일업계와 경쟁하는 OPEC+는 이 틈을 타 증산에 나서면서 잃었던 시장 점유율을 되찾을 태세다. OPEC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10년 전 40%에서 올해 25% 미만으로 떨어졌으며, 같은 기간 미국 점유율은 14%에서 20%로 올랐다. 반면 OPEC+의 시장 점유율은 현재 48% 정도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OPEC+는 오는 7월부터 산유량을 하루 41만1,000배럴 늘리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는 당초 계획의 3배에 달하는 양으로 최종 결정은 6월 1일 열리는 회의에서 나올 예정이다. OPEC+는 이달부터 매월 생산량을 41만1,000배럴 늘리면서 유가를 끌어내리고 있다. OPEC+는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과잉 생산국에 대한 응징과 시장 점유율 회복, 트럼프 대통령 달래기 등이 이유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