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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웨이퍼 세계 3위 SK실트론 매각
지분 구조 단순해 매각 측 정무적 부담↓
“SK 체질 전환 실패의 단적인 예” 평가

SK그룹이 몸값 5조원대로 거론되는 반도체 웨이퍼(반도체 원판) 제조사 SK실트론 매각을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그룹 전반의 유동성 위기에 매년 2조원이 넘는 매출을 자랑하는 알짜 사업을 내놓기로 한 것이다. 애초 시장에서는 SK스페셜티를 인수한 한앤컴퍼니가 SK실트론 또한 인수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지만, SK가 높은 매각가를 위해 여타 대형 사모펀드들과도 물밑 접촉하면서 그 향방을 알 수 없게 됐다.
유력 후보 한앤컴퍼니는 ‘국적 논란’ 해소해야
16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SK그룹은 최근 SK실트론 매각을 위해 최소 4곳의 사모펀드에 경영권 인수를 제안했다. SK의 제안을 받은 사모펀드로는 한앤컴퍼니와 MBK파트너스(MBK), IMM프라이빗에쿼티(IMM PE), 스틱인베스트먼트(스틱) 등이 거론된다. 이들 사모펀드 가운데 IMM PE와 스틱은 컨소시엄을 구성해 SK실트론 경영권을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SK실트론은 웨이퍼 전문 생산 기업으로, SK하이닉스가 주요 고객이다. SK는 지난 2017년 LG그룹으로부터 해당 사업을 인수해 SK하이닉스와 시너지를 도모했고, 그룹 내부적으로는 이 같은 결정을 핵심 밸류체인 구축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투자로 자평했다. 하지만 적극적인 사업 확장에 따른 재무부담 확대와 반도체 사이클 변동에 따른 실적 둔화 폭이 커지면서 경영 효율화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SK가 이번에 SK실트론을 매각하게 되면, 지난해 SK렌터카와 SK스페셜티에 이어서 또 한 번 ‘알짜 자산’을 매각하는 게 된다.
MBK의 경우, 이번 인수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최근 홈플러스 회생절차 관련 논란과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여파로 국내 시장에서 인수합병(M&A)이 사실상 제한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올해 상반기 M&A 시장의 최대어로 불리는 CJ제일제당 바이오사업부 인수전에서 MBK가 조용히 자취를 감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앤컴퍼니도 상황이 우호적이지 않다. SK실트론이 전 세계 생산량의 10% 이상을 차지한 반도체 웨이퍼는 국가핵심기술로, 해외법인에 매각할 때 정부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한앤컴퍼니는 한국에 등록된 사모펀드 운용사지만, 대표인 한상원 사장의 국적이 미국이다. 정부는 2023년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외국인의 지배를 받는 국내 사모펀드 운용사를 외국 기업 범주에 포함한 바 있다. 다만 한앤컴퍼니가 그동안 국내 사모펀드로 분류됐고, 지금까지 SK그룹 계열사 9곳을 인수한 전례가 있는 만큼 유력 인수 후보라는 반론 또한 나온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지금으로선 한앤컴퍼니가 가장 유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결국 MBK를 제외한 3강 구도에서 IMM PE와 스틱이 얼마나 경쟁력 있는 인수 대금을 SK에 제안하는지에 따라 SK실트론의 새 주인이 결정될 공산이 크다. 현재 매물로 나온 건 SK실트론 경영권 지분 70.6%다. 시장이 평가하는 SK실트론 기업가치가 5조원가량인 것을 고려하면, 이번 매각은 3조원대 중반 이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못 해도 중박, 잘하면 대박’ 엑시트 시나리오 탄탄
현재 인수 후보들은 매력적인 엑시트(투자금 회수) 시나리오에 끌려 SK실트론 인수를 적극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SK실트론이 계열사인 SK하이닉스는 물론 삼성전자, 인텔, 마이크론 등 굵직한 대형 고객사를 확보하고 있는 만큼 안정적인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SK실트론의 지난해 연결기준 매출은 2조1,268억원, 영업이익은 3,155억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5%, 12% 증가했다.
글로벌 경쟁력도 막강하다. 세계 반도체 웨이퍼 시장은 5개 회사가 과점하는 구조다. 한국신용평가에 의하면 지난해 300㎜ 웨이퍼 기준 일본 신에쓰의 시장 점유율이 31.7%로 가장 높았으며, 섬코가 20.9%로 2위, SK실트론는 17.8%로 3위를 기록했다. 이어 대만 글로벌웨이퍼스(12.9%), 실트로닉(9.4%) 순이다. 지난해 세계 반도체 웨이퍼 시장 규모가 171억 달러(약 24조5,000억원)에 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3조원 대의 인수 대금이 결코 높은 수준이 아니라는 평가다.
향후 중국 등 해외 기업에 매각하면, 그 가치는 훨씬 올라갈 수도 있다. 지난해 중국은 자국 내 웨이퍼 기술 확보를 숙원 과제로 삼고 오는 2027년까지 세계 웨이퍼 시장 점유율을 15%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또 이를 위해 국유 반도체 소재 전문 기업인 후이구이산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 중이다. SK실트론을 인수해 일정 기간 운영한 뒤 중국 측에 매각한다면, 인수 주체로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셈이다.
절박함에 전략적 가치도 포기
이번 SK실트론 매각은 인수자보다 매도자인 SK의 절박함이 더 크게 드러나는 사안이다. SK그룹은 최근 몇 년간 수소, 전기차, 친환경 에너지 등 미래사업에 조(兆) 단위 투자를 단행했지만, 돌아온 건 막대한 손실과 재무 건전성 악화였다. 여기에 SK온, SK이노베이션 등 주요 계열사들이 줄줄이 적자를 내면서 그룹 전체적으로 ‘현금이 마르는 위기’에 봉착했다. SK실트론은 그런 와중에 가장 먼저 현금화 가능한 카드로 탁자 위에 올려진 것이다.
SK가 그간 반복된 거래로 끈끈한 관계를 다져온 한앤컴퍼니는 물론 여타 사모펀드들에까지 SK실트론 인수를 제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동성 확보가 시급한 SK로서는 인수 후보의 조건을 하나하나 따질 여유보다는 ‘누가 현금을 많이 들고 오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SK가 하이닉스와 실트론의 시너지라는 전략적 가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기도 하다.
SK는 이미 지난해부터 계열사 매각을 통한 구조조정에 돌입한 상태다. SK스페셜티, SK머티리얼즈 등 비교적 매각이 수월한 자산들이 먼저 시장에 나왔고, 지금까지도 일부 거래는 진행 중이다. SK실트론은 그중에서도 ‘몸값은 높은데 정리하기 쉬운 자산’에 해당한다. SK가 과반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최태원 회장의 개인 지분 또한 없는 구조인 만큼 정무적 부담이 적다는 분석이다.
최근 SK가 추진했던 미래사업들이 모두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번 SK실트론 매각은 단순한 계열사 매각이 아니라 SK의 전반적인 체질 전환 실패를 드러내는 단면이기도 하다. 대외적으로는 ‘사업 재편’이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현금 확보 없이는 버틸 수 없는 구조라는 현실이 분명해지고 있다는 게 시장 참여자들의 일관된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