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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경제통상장관, WTO 개혁·3국 FTA 추진 합의 中 트럼프 관세 압박 적극적으로 견제 전문가들 "무조건 중국 손잡는 게 능사는 아냐"

한국·일본·중국 경제통상장관들이 6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관세를 필두로 한 미국의 통상 압박이 가중되는 가운데, 돌파구 마련을 위해 3국이 머리를 맞대는 양상이다. 3국은 유명무실화된 세계무역기구(WTO)를 개혁하고, 그동안 논의가 중단됐던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협상을 가속화하기로 뜻을 모았다.
한중일 통상 협력 논의
30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무토 요지 일본 경제산업성 대신,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 부장과 함께 '제13차 경제통상장관회의'를 개최했다. 이번 회의는 지난해 5월 진행된 3국 정상회의의 후속 조치를 위한 자리다.
3국 장관은 이날 채택된 공동선언문을 통해 "WTO를 중심으로 한 규범 기반의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며 비차별적인 다자무역체제를 지지한다"며 "WTO가 현재의 무역 과제에 보다 효과적이고 회복력 있게 대응할 수 있도록 협상과 모니터링, 심의·분쟁 해결 등 모든 기능을 강화하고 개혁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3국은 예측 가능한 비즈니스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공급망 안정화와 수출 통제 관련 소통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녹색·디지털 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산업·에너지 협력 강화도 추진된다.
한중일 FTA 논의에도 속도를 내기로 했다. 3국 FTA는 2012년부터 추진돼 왔지만, 2019년 관계 악화 등으로 관련 협의가 중단된 바 있다. 3국은 작년 5월 정상회담을 계기로 FTA 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했으나, 이후에도 실질적인 논의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견제하는 中
3국의 협력 논의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 장벽에 대응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 풀이된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 여부와 관계없이 상대국에 대한 통상 압박을 강화하며 돌파구 마련이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과 장기간 무역 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 측이 적극적으로 미국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 부장은 회의에서 "일방주의와 보호주의가 세계 경제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며 미국의 관세 조치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반면 한국과 일본 측은 미국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원론적인 수준에서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그쳤다.
FTA를 대하는 태도에도 온도차가 있었다. 왕 부장은 29일 안덕근 장관과의 한중 장관회담에서 "중국과 한국은 모두 자유무역과 다자주의의 수혜자이자 수호자"라며 "지역 및 다자 틀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한중 FTA 협상의 조속한 재개를 추진해 다자무역 체제를 공동 수호하고 지역 경제 통합을 촉진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회담 직후 발표 자료에서 관련 언급을 자제하며 신중한 입장을 유지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미·중 전략 경쟁 국면에서 3국 경제 협력 강화를 '대안 외교'의 기회로 활용하려 한다고 분석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중국은 바이든 정부의 가치동맹 구도보다는 트럼프식 자국우선주의 속에서 경제적 여지가 더 크다고 판단하는 듯하다"며 "FTA 협력 확대도 같은 전략적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의 '진짜 바람'은
다만 시장에서는 무조건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대응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진의'를 보다 확실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시장 전문가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는 세계와 자국을 위기에 몰아넣기 위한 조치는 아니다"라며 "오로지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만이 관세를 비롯한 통상정책 수립의 기준이 된다"고 짚었다. 이어 "이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한 러스트벨트에 대한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가 미국의 고용 위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한동안 활기를 띠던 미국 노동 시장은 지난해 여름부터 눈에 띄게 위축되고 있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사람은 3,960만 명에 달했다. 이는 일자리 쇼핑이 가장 활발했던 2022년 대비 22% 감소한 수준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 같은 추세가 앞으로 더욱 심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향후 우리나라 기업들이 대미 직접 투자를 확대하며 미국의 고용 안정에 기여할 경우, 관세를 필두로 한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압력을 회피할 수 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장벽은 자국 내 투자 유치를 유도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미 FTA 체제를 유지하면서 지금과 같이 높은 수준의 상품 수지 흑자를 유지하면 유의미한 실익까지 확보할 수 있다. 중국의 구상에 발맞춰 미국을 외면하는 것은 좋은 선택지가 아닐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