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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룟값 상승·고환율 압박에 백기 든 유통업계 커피·케이크·맥주·라면 등 줄줄이 가격 인상 가뜩이나 얼어붙은 소비 심리, 경기 개선 걸림돌

최근 국내 주요 유통업체들이 원재료 가격 상승과 고환율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잇따라 가격 인상에 나서면서 한국 경제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물가 인상에 따른 소비 심리 위축이 경기 둔화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고물가 기조에 소비를 줄이는 것은 당연한 대응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내수 경기를 침체시키고 기업들의 매출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불러온다. 이는 경기 부양을 위한 금리인하 등 통화 정책 전환에도 걸림돌인 만큼 가뜩이나 부진을 이어가고 있는 내수 침체의 골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맥주·라면 등 식품 가격 줄인상
25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농심은 17일부터 17개 제품의 출고가를 평균 7.2% 인상했다. 이는 2022년 9월 이후 약 2년 6개월 만의 가격 조정이다. 지난해 신라면과 새우깡은 한 차례 가격을 내렸으나, 이번 가격 인상을 통해 기존 수준으로 복귀하게 됐다. 대표적인 인상 품목은 신라면이다. 신라면의 소매점 가격은 950원에서 1,000원으로 5.3% 올랐다. 또한 너구리는 4.4%, 안성탕면은 5.4%, 짜파게티는 8.3%씩 각각 인상됐다.
오뚜기도 가격 인상에 나선다. 오뚜기는 다음달부터 27개의 라면 유형 중 16개의 출고가를 평균 7.5% 인상할 방침이다, 이는 2022년 10월 이후 2년 5개월 만의 가격 인상이다. 대표적인 라면인 진라면 봉지면은 716원에서 790원으로 10.3%, 용기면은 1,100원에서 1,200원으로 9.1% 인상될 예정이다. 오뚜기는 지난달에도 3분 카레, 컵밥 등 대표 제품 가격을 올린바 있다.
맥주 가격도 인상된다. 국내 맥주 시장 1위인 오비맥주는 카스·한맥 등 주요 제품의 공장 출고 가격을 평균 2.9% 올린다. 가격 인상은 2023년 10월 주요 제품 값을 평균 6.9% 올린 이후 약 1년 6개월 만이다. 롯데아사히주류가 수입하는 일본 맥주 아사히도 지난 1일부터 가격이 8~20% 올랐다. 하이트진로도 이달 데땅져·얀 알렉상드르 등 와인·샴페인 800여 종 중 200여 종의 가격을 평균 1.9% 인상했다.
유업계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매일유업은 오는 5월 컵커피와 치즈 등 제품 51종의 가격을 평균 8.9% 인상한다. 가격이 조정되는 컵커피는 14종, 치즈류는 20종이다. 바리스타 룰스(250㎖)는 3.6%, 스트링치즈 플레인이 7.4% 각각 오른다. 두유와 아이스크림, 가공유 가격도 인상된다. 매일두유 검은콩(190㎖) 10.5%, 엔요 얼려먹는 요구르트 5.3%, 허쉬드링크 초콜릿(190㎖) 11.8% 등이다.
커피 전문점도 가격 인상 도미노
최근 커피 원두 가격이 치솟으면서 커피 전문점들의 가격 인상 도미노도 이어지고 있다. 투썸플레이스는 오는 26일부터 커피 23종, 음료 22종 등 일부 제품의 가격을 조정한다. 평균 인상률은 4.9%이다. 이에 따라 레귤러 사이즈 기준 커피 제품 23종의 가격은 각 200원씩 인상되며 샷·시럽 등 고객 옵션은 각각 300원, 디카페인 변경 옵션은 200원 인상된다. 홀케이크는 평균 2,000원, 조각 케이크는 평균 400원이 인상된다.
저가 커피 브랜드 더벤티는 이달부터 아이스 아메리카노(벤티 사이즈) 가격을 200원 인상했다. 더벤티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가격 인상은 11년 만에 처음이다. 또 다른 저가 커피 브랜드 컴포즈커피도 지난달 13일부터 아이스 아메리카노(1,800원)와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2,500원) 가격을 모두 300원씩 올렸다. 스타벅스 역시 지난 1월 24일 아메리카노 톨사이즈 가격을 4,500원에서 4,700원으로 인상하는 등 음료 22종 가격을 인상했고 할리스, 폴바셋도 같은 달 가격을 인상했다. 업계에서는 아직 가격 인상에 나서지 않은 메가MGC커피, 빽다방 등도 가격을 올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기업들이 가격 인상 카드를 꺼내든 건 원재료 가격 상승, 환율 불안, 물류비 증가라는 삼중고가 업계를 압박하고 있어서다. 라면, 음료 등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는 밀, 팜유, 설탕 등의 국제 원자재 가격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물류비 부담도 커지고 있다. 특히 국내 유통업계는 원부자재의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달러 강세가 지속될수록 수입 단가 상승이 불가피하다. 이는 곧 생산 비용 증가로 이어지고, 결국 가격 인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압박도 통하지 않는 모양새다. 농식품부는 식품업체, 외식업체 임원들을 불러 가격 인상 자제를 요청하고 있지만, 통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 식품업체 임원은 “원재료 인상 등으로 가격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데, 최근 어수선한 상황인 데다 업체들이 앞다퉈 가격을 인상하니 이때 아니면 못 올린다는 인식이 퍼져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도 "경영 제반 비용이 많이 인상됐지만 회사가 부담을 흡수해 왔다"며 "최근 고환율에 원재료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더 이상 부담을 안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가격 인상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소비 감소에 따른 경기 위축 우려 확산
업체들의 이런 흐름은 소비자물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통계청의 소비자물가동향에 따르면 2월 소비자물가지수는 116.0(2020년=100)으로, 전년 동기 대비 2.0% 상승했다. 2개월 연속 2%대 오름세다. 특히 외식 물가는 3.0%, 가공식품 물가는 2.9% 상승하며 체감 물가 상승을 이끌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난달(2.2%)보다 낮아진 건 다행이지만 한국은행의 물가안정목표 2% 상단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은 불안 요소다. 물가가 지속적으로 오르게 되면 실질소득 감소로 이어져 소비가 위축되고, 기업들의 매출‧고용 감소 등 악순환을 부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소비자물가 상승이 한은의 통화 정책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라는 점이다. 소비자물가가 상승한다는 것은 물가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한은에 있어 최근 2%대에 진입한 기준금리를 다시 인상할 빌미로 작용할 수 있다. 기준금리가 상승하면 은행 대출금리가 오르게 되고, 이는 소비자와 기업의 비용을 증가시키게 된다. 소비자들이 대출을 꺼리게 되면 소비가 위축되고, 이는 결국 물가 상승률에 또 다시 영향을 미치는 구조다.
국내 소비 부진은 이미 수치로도 드러나 있다. 통계청의 최근 수치인 올해 1월 소매판매액 지수 잠정치를 보면 작년 1월과 같은 수치를 기록했지만, 2024년 내내 전년 동월 대비 소매판매액지수(불변지수 기준) 상승률은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했고, 12개월 수치의 평균은 -2.1% 수준이었다. 이는 2003년 카드사태 이후 가장 낮은 증가율이자, 2008년 금융위기나 심지어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보다도 더 나쁜 실적이다. 이 같은 소비 위축은 결국 기업들의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소비 감소로 인한 영업이익 감소를 소비자 가격 인상으로 상쇄하려 할 수 있어서다. 이미 오랜 기간 인플레이션 상방 압력으로 내수 경기 침체가 지속되는 와중에 경기 침체의 파고가 더욱 높아질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