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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M 시장의 병폐 '캡티브 영업' 증권사 간 실적 경쟁 과열로 시장 왜곡돼 금감원, 증권사들에 캡티브 영업 관련 자료 제출 요구

채권발행시장(DCM) 내 캡티브(captive) 영업 행태가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다. 주관사 자리를 둘러싼 증권사들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발행사들이 이를 약점 삼아 금리 수준·참여 계열사·인수 물량 등을 직접 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금융감독원은 증권사들을 향해 칼을 빼 들며 시장 왜곡을 최소화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증권사들 너도나도 '캡티브 영업'
24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최근 CJ·포스코·LG 그룹 등 대기업들은 입찰제안요청서(RFP) 단계에서부터 캡티브 수요를 사실상 강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다. 실제 △CJ ENM(26-1회차) △포스코(314-2) △LG화학(58-2) △LG에너지솔루션(4-1) 등 이들 그룹의 일부 계열사 회사채는 발행 직후 유통 시장에서 발행금리보다 2~7bp(1bp=0.01% 포인트) 높은 금리, 액면가 미만의 가격으로 거래됐다.
이에 시장에서는 캡티브 물량이 시장에 곧바로 풀린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캡티브 영업은 증권사들이 리테일·운용·영업·FICC 파트 등을 통해 직접 회사채 매수 주문을 넣는 것을 뜻하는 용어로, 국내 채권발행시장에서는 증권사가 회사채 주관사 선정을 조건으로 수요예측에서 낮은 금리에 일정 물량의 매수 주문을 넣겠다고 약속하는 특유의 영업 방식으로 통하고 있다.
이 같은 행위는 CJ·포스코·LG그룹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올해 1분기 △현대제철(140-1) △현대글로비스(2-1) △현대엘리베이터(40-1·40-2) △한화에너지(25-1·25-2) △한화토탈에너지스(29-1) △한화(252-1) 등의 채권 역시 발행 직후 액면가를 밑도는 가격에 유통 시장에 나왔다. 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사례는 현대엘리베이터 40-2회차 채권이다. 해당 채권은 발행 금리 대비 약 30bp 이상 높은 수익률로 거래됐다. 일반적으로 주관 수수료가 20bp 안팎인 점을 고려하면, 증권사는 사실상 손실을 감수하면서 웃돈을 얹어 물량을 던진 셈이다. 해당 채권의 주관사는 KB증권, 한국투자증권, 미래에셋증권이 맡았다.
왜 캡티브 영업 뛰어드나
증권사들은 지난해에도 적극적으로 캡티브 영업을 벌였다. 일례로 2024년 3월 HD현대그룹의 건설기계 부문 계열사인 HD현대건설기계(신용등급 A)는 총 600억원 규모의 회사채 조달을 위한 수요예측을 진행, 총 모집 물량의 17배에 가까운 1조190억원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수요예측 결과표에서 기존 ‘큰손’인 연기금·공제회의 이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들의 빈자리는 주관사와 인수단으로 참여한 증권사와 관련 금융 계열사들이 차지했다.
매수 주문을 넣은 금리 수준도 시장 잣대보다 낮은 편이었다. 2년물의 경우 한국투자증권·키움증권·미래에셋증권 등이 HD현대건설기계의 개별민평금리(채권 평가사들의 평균 평가 금리) 대비 50~-44bp 낮은 수준에서 주문을 넣었다. 3년물에서도 신한투자증권·삼성증권·대신증권·NH투자증권·KB증권 등이 개별민평을 크게 밑도는 금리에 주문서를 냈다. 모두 이번 회사채 발행 주관사와 인수단에 포함된 증권사다.
같은 달 7일 회사채를 발행한 롯데물산(AA-)의 수요예측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롯데물산은 한국투자증권·신한투자증권·KB증권·대신증권·하나증권·하이투자증권·한화투자증권·미래에셋증권·키움증권 등 증권사 9곳을 주관사와 인수단으로 선정했으며, 1,000억원 모집에 총 4,500억원의 주문을 받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대부분 물량이 주관사와 인수단에 있는 증권사나 보험사·자산운용사 등 관련 금융 계열사 주문이었다.
이처럼 채권발행시장에서 캡티브 영업이 꾸준히 성황을 이루는 배경에는 증권사들의 치열한 실적 경쟁이 있다. 캡티브 영업 요구를 거절하는 순간 주관사 선정에서 밀릴 수 있다는 우려 탓에 증권사들이 발행사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인지한 발행사들은 오히려 요구 수위를 높이며 주도권을 쥐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제는 캡티브 물량 확보가 주관사 선정의 전제 조건처럼 굳어지는 분위기다. 이와 관련해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리나 만기 조건은 기본이고, 일부 발행사는 어느 계열사가 어느 트랜치에 얼마를 넣어야 한다는 식의 구체적인 지침까지 제시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심지어 회사채를 만기까지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도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압박 본격화
반복되는 캡티브 영업으로 인해 시장의 왜곡이 가속화하자, 금융당국은 본격적으로 증권사들에 압박을 가하고 나섰다. 현재 금감원은 증권사들에 RFP, 실제 참여 물량 내역, 계열사 및 타 부서의 참여 현황 등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한 상태다. 특히 RFP에 내부 물량을 확정적으로 기재했거나, 실제 수요예측에 참여한 이력이 있는 증권사의 경우 검사를 피해 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은 KB증권,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등 대표적인 DCM 상위권 증권사들이 당국의 핵심 타깃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적극적으로 캡티브 영업을 수행한 주관사 중 한 곳으로 꼽히는 NH증권은 검사 이후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미 캡티브 영업 행태가 극심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지난해에 금감원 종합검사를 별 탈 없이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NH증권 관계자는 "종합검사 당시 문제 소지가 있는 거래에 대해 모두 소명을 완료했고, 이번 검사도 자신이 있다"고 밝혔다. 리그테이블(증권사와 법무·회계법인 등 자본 시장 참가자들의 거래 자문·주관 실적 순위표) 수성에 부담이 큰 KB증권도 캡티브 수요를 동원한 정황이 포착됐으나, 확정적인 물량 기재를 피하고 미온적인 태도를 유지해 온 만큼 검사 결과가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한국투자증권 역시 금융감독원 검사를 받는 중이다. 같은 시기 검사를 받기 시작한 신한투자증권은 이미 지난 19일 검사가 완료됐으나, 한국투자증권에 대한 검사는 좀처럼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업계 최대 규모 발행어음 잔액을 보유하고 있어 회사채 투자 여력도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