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기업과 활발하게 M&A 진행하는 日, 금융화의 서막인가
입력
수정
해외 자본에 속속 팔려나가는 日 기업들 日 소프트뱅크 등도 해외 기업 인수에 박차 美처럼 제조업 내려놓고 '금융화' 노선 밟을까

일본 인수합병(M&A) 시장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외국 기업의 일본 현지 M&A 시도와 일본 기업의 외국 기업 인수 움직임이 나란히 활발해지며 일본 산업계 자체가 변화의 국면을 맞이하는 양상이다.
日 M&A 장벽 대폭 낮아져
8일(이하 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 기업이 일본 기업을 완전 자회사화하거나 과반 지분 취득 인수를 제안한 사례는 193건에 달했다. 이는 관련 기록상 1998년 이후 최대 규모다. 올해 1월부터 8월 말까지의 누계는 157건으로, 이 추세가 지속될 경우 사상 최대 기록을 재차 경신할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에서는 외국 기업들의 M&A 시장 진입이 활발해진 원인으로 일본 정부의 M&A 행동 지침을 지목한다. 앞서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해 8월 기업 인수에 관한 행동 지침을 발표하고, 정당한 인수 제안의 경우 무조건 거부하지 않고 신중하게 검토하도록 기업에 권고했다. 과거 '사풍 불일치'와 같은 모호한 이유로 해외 자본의 투자를 막았던 일본 산업계의 관행에 제동을 건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해 교토대학 경영관리대학원의 마쓰모토 시게루 특명교수는 “과거에는 인수 대상 기업의 경영진이 제안을 거부하면 일방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러나 일본의 거버넌스 개혁과 인수 행동 지침 제정에 따라 문전박대는 이제 (일방적인 인수 거부가)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역사적인 엔저 현상과 기업 측의 부실한 인수 방어책도 외국 기업 M&A 시도 증가의 배경으로 꼽힌다. 일본 기업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 울리케 셰데 교수는 “엔저로 인해 일본에는 저평가된 거래가 많다는 점과 더불어 20년에 걸친 기업 지배 구조 개혁의 결과로 일본 기업이 방어 수단을 상실한 점이 핵심 요인”이라며 “그들은 벌거벗은 상태나 다름없으며, 무기조차 갖고 있지 않다”고 분석했다.
아웃바운드 M&A도 급증
반대로 일본 기업이 해외 M&A를 시도하는 사례도 증가하는 추세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글로벌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의 아웃바운드(해외 기업) M&A는 502억 달러(약 69조7,480억원) 규모로, 같은 기간 발생한 인바운드(일본 기업) M&A 규모(289억 달러)의 두 배에 달했다. 섹터별로는 금융(249억 달러), 정보기술(68억 달러), 임의소비재(55억 달러), 헬스케어(39억 달러), 원자재(38억 달러) 등의 순으로 M&A 규모가 컸다.
올해 들어서도 이 같은 아웃바운드 M&A 열풍은 이어졌다. 지난 2월 일본 4대 생명보험사 중 하나인 메이지야스다생명보험은 23억 달러(약 3조1,930억원)에 미국 리걸앤제너럴 보험 사업부를 인수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해외 보험 시장을 개척해 일본 내 고령화·저금리 위기를 상쇄하고, 수익 안정화 및 다변화를 꾀하겠다는 구상이다.
지난 3월 영국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 Arm의 대주주인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역시 미국 팹리스 업체 암페어컴퓨팅을 65억 달러(약 9조5,0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밝혔다. 당시 소프트뱅크는 보도자료를 통해 "자회사인 실버밴즈6를 통해 암페어컴퓨팅의 모든 지분을 취득할 것"이라며 "이 거래는 미 당국 승인을 거쳐 2025년 후반에 완료될 것으로 전망되며, 거래 결과 암페어는 간접적 완전 자회사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는 암페어컴퓨팅의 대규모 데이터 처리 및 인공지능(AI) 역량을 활용해 Arm의 설계 능력을 보완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고개 드는 금융화 가능성
일본 기업들이 외국 기업들과 지분을 주고받으며 활발하게 M&A를 진행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일본이 점진적으로 미국처럼 '금융업 중심 국가'로 변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미국 산업계는 1971년 미국의 금태환 파기 선언 이후 빠르게 금융화(Financialization)돼 왔다. 금융화란 한 국가의 금융 부문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확대되는 현상으로, 일반적으로 산업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에서 일어난다.
미국은 쇠퇴하기 시작한 제조업을 뒤로하고,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활용해 금융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했다. 미국 자본이 외국의 금융 시장을 개방시키며 활발하게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1990년대 말 규제 완화를 기점으로 미국 금융업은 재화·서비스 생산 등 실물 경제보다 구조적 우위에 서게 됐고, 금융화는 금융계를 넘어 미국 경제 전 분야에 퍼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미국 금융계 수익이 제조업 부문 수익의 2~3배를 웃돌게 됐다. 금융이 단순히 실물 경제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 지배하고, 자본 운용 역량이 곧 시장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를 비롯한 미국의 자본가들은 패밀리 오피스(하나 이상의 가문의 자금을 직접 운용하거나, 운용 자문을 제공하는 비상장사)를 설립하는 등 개인 자산 관리에 총력을 기울이는 추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