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대기업 임금체불 급증, ‘영세 업체 전유물’ 통념 깨지며 노동시장 경고등
입력
수정
1~7월 대기업 체불액 244억원 달해
정부 “임금체불은 범죄행위” 규정
‘고용 기반 약화 전조’ 해석 가능

올해 들어 7월까지 국내 사업장에서 발생한 임금체불액이 지난해 전체 체불 규모를 크게 웃돌며 노동시장의 불안정을 드러냈다. 정부는 임금체불을 범죄로 규정하며 법정형 상향을 비롯한 강경 대응 방침을 내놨지만, 정책 집행력과 예방효과를 두고 회의적 시각이 주를 이룬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일시 감소했던 체불이 다시 급증하는 가운데, 폐업과 고용 축소가 동반되며 장기적 일자리 기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단 우려 또한 제기된다.
대기업도 대응 여력 부족
17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김주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3년간 업종별·사업장 규모별 임금체불 현황’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임금체불액은 총 1조3,42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1조2,261억원보다 1,159억원 증가한 규모다. 사업장 규모별로는 여전히 5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이 3,833억원으로 가장 많은 체불액을 기록했지만, 중대형 사업장의 체불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1,000명 이상 근로자를 둔 대기업 체불액은 지난해 연간 171억원이었으나 올해는 7월까지만 244억원으로 급증하며 작년치를 크게 웃돌았고, 중견기업 역시 100~300명 사업장 체불액이 1,522억원으로 지난해 연간 체불액(1,510억원)을 초과했다. 이 같은 추세는 과거 임금 체불이 영세 사업장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세간의 통념에 정면으로 반하는 결과다.
업종별로는 제조업(3,873억원)과 건설업(2,703억원)이 전체 체불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제조업과 건설업 외에도 운수창고·통신업(1,963억원), 학원·병원 등 기타 업종(1,706억원), 도소매·음식숙박업(1,536억원)에서도 심각한 수준을 보이면서 산업 전반에서 임금 지급 불안이 확산하는 흐름을 보였다.
임금체불 문제는 단순한 수치 증가를 넘어 현장의 분쟁으로도 직결된다. 2022년 14만4,000여건이던 임금체불 진정은 2024년 18만2,000건으로 급증했고, 같은 기간 관련 고소·고발 건수도 1만800여건에서 1만2,500건으로 늘었다. 불과 3년 사이 4만건 가까운 법적 대응이 추가된 셈이다. 올해 상반기에도 이미 9만7,000여 건이 접수돼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면서 또 한 차례 최고치를 기록할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경기침체와 비용 압박의 직접적 반영으로 본다. 과거 임금체불이 유동성 취약 기업에 집중됐다면, 현재는 고정비 부담이 커진 대형 사업장까지 확산됐단 지적이다. 이는 산업 전반의 체력 저하를 보여주는 신호인 동시에 근로자 생활안정에도 중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진다. 김 의원은 “임금체불은 단순히 청산 여부를 넘어 재발을 막는 예방책이 중심이 돼야 한다”며 “정부와 국회가 함께 근본적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법적 처벌 강화 및 근로자 보호조치 확대 추진
정부 역시 임금체불을 ‘절도’와 같은 것으로 보고 강도 높은 제재에 돌입했다. 고용노동부는 이달 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범정부 임금체불 근절 추진 태스크포스(TF)’를 열고 임금체불 근절대책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체불행위는 임금 절도이자 중대한 경제적 범죄라는 인식이 현장에 확실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겠다”며 “임금체불이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을 개선해 체불 발생을 원천 차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대책을 보면, 임금체불 사업주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강화된다. 현재 임금체불의 법정형은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그치는데, 이를 횡령죄 수준인 5년 이하의 징역형으로 높인다. 또 3년 내 두 번 이상 체불로 확정 판결을 받아야 공개되는 사업주 명단도 한 번의 판결만으로 가능해지도록 할 예정이다. 명단이 공개된 사업주가 다시 체불을 할 경우,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 형사처벌 불가능)에서 제외된다.
임금체불의 구조적 원인을 막기 위한 법 개정도 추진된다. 일례로 정부는 도급계약 때 임금에 해당하는 몫을 구분해 하청업체에 지급하도록 하는 ‘임금비용 구분 지급 의무’를 근로기준법에 담을 예정이다. 이를 위해 내년 상반기 표준하도급계약서를 보급한 이후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사회적 논의를 거쳐 개정 법을 적용할 업종을 확대할 방침이다.
노동계는 이 같은 정부의 대책 마련이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놨다. 박성우 직장갑질119온라인노동조합 위원장은 “체불사업주에게 임금을 늦게 줄수록 손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며 “지연이자를 지급하지 않을 경우에도 사업주를 처벌해 체불임금이 신속하게 청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노총 역시 “반의사불벌죄의 전면적·즉시 적용 제외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기침체 장기화에 일자리 감소 가능성↑
불과 3년 전만 해도 임금체불 규모는 뚜렷하게 줄어드는 흐름을 보였다. 2019년 1조7,217억 원이던 체불액은 코로나19 확산 직후인2020년 1조5,830억 원으로 8.1% 감소했고, 2021년 1조3,505억 원, 2022년 1조3,472억 원으로 연속 감소세를 그렸다. 그러나 2023년 들어 상황은 급변했다. 당시 임금체불액은 1조7,845억 원으로 전년 대비 32.5% 급증했다. 특히 5인 미만 영세 사업장의 체불액은 2022년 4,533억 원에서 2023년 6,150억 원으로 35.7% 급증, 위기가 취약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했음을 시사했다.
이 같은 임금체불 추세는 사업체 폐업 통계와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국세청 자료에 의하면 2019년 국내 폐업자 수는 92만2,000곳이었는데, 2020년 89만5,000곳, 2021년 88만5,000곳, 2022년 86만7,000곳으로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이 역시 2023년에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당시 폐업자 수는 98만6,000곳으로 전년 대비 13.7% 증가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며 임금체불 폭증과 맞물렸다. 이와 함께 사업장 도산·폐업을 사유로 한 체불액 비중 또한 2022년 14.0%에서 2023년 지난해 상반기 18.1%까지 치솟았다.
전문가들은 팬데믹 시기 정부 지원이 임금체불을 일시적으로 억눌렀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노동연구원은 임금체불 원인분석 및 감소방안 마련’ 보고서에서 “체불 규모와 유의한 상관관계를 갖는 변수는 지역내총생산으로, 경기가 좋을수록 체불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면서도 “2020년 지급된 고용유지지원금의 효과는 정량적으로 추정하기 어렵지만, 임금체불 억제에 일정한 영향을 준 점은 분명하다”고 짚었다. 이는 팬데믹 시기 일시적으로 급감했던 임금체불은 정부 개입에 따른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전방위적 금융지원이 지속되는 경기침체 국면에서는 그 효과를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병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체불 문제는 대지급금 지급이나 사업주 제재 강화로 해결할 수밖에 없으며, 소규모 사업장 지원만으로는 지속 효과를 담보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 역시 “사업주의 체불이 불가피한 상황인지 면밀히 따진 뒤, 필요한 경우에만 맞춤형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