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디지털 자산 모두 제어 필요” 한국은행 총재의 신중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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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코인’ 두 가지 핵심 메시지 정리
부동산 시장 장기 안정성 확보 논리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한계와 과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대학 특강에서 금리만으로는 부동산 가격을 억제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며 기준금리 2.50% 동결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는 정부가 연속적인 대출 규제와 공급 확대로 투기 심리를 꺾으려는 기조와도 맥락이 닿는 발언으로, 단기적인 경기 부양보다 근본적 해법에 초점을 둔 그의 철학을 드러낸다. 또 이 총재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역시 국제적 수요와 제도적 기반이 부족하다며 ‘G2’ 담론을 공포마케팅으로 일축했다. 시장 전문가들 역시 원화 역외거래 허용, 단기 국채 도입 등 구조적 과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실질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데 이 총재와 전망이 일치했다.
금리·통화정책 전반에 일관된 관점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 총재는 전날 서울대에서 열린 ‘통화정책과 구조개혁’ 특강에 강연자로 섰다. 이 자리에서 이 총재는 “금리로는 부동산 가격을 잡을 수 없다”면서 “금리 0.25%p” 인하를 한두 달 미뤄도 경기를 잡는 데는 큰 영향이 없겠지만, 금리 인하 시그널로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더 고생한다”고 말했다. 7월에 이어 지난달도 기준금리를 2.50%로 동결한 것은 일방적인 유동성 공급으로 부동산 시장 불안정을 야기하지 않겠다는 철학에 따른 결정이란 의미다.
이번 발언으로 이 총재는 단기적 경기 부양보다 시장 안정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드러내며 금리 정책의 한계를 분명히 했다. 섣부른 금리 인하가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면, 투기적 수요를 자극해 시장 불안정을 키울 것이란 경계심에서다. 이는 금리 등 통화 정책이 경기 흐름을 조절하는 데 단기적으로 일정 역할을 하더라도 부동산과 같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부족하다는 그간의 입장과도 일치한다.
이 총재는 이어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생기는 이익은 잘 안 보이는데, 기존 화폐제도를 흔드는 면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원화를 기초로 한 스테이블코인이 달러 기반의 시장 침투를 막아내거나 한국을 새로운 발행 축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일부 주장은 사실상 근거가 부족하다고 반박했다. 이 총재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만든다고 달러 스테이블코인 침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짚으며 “우리가 먼저 발행하면 ‘스테이블코인 G2(주요 2개국)’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공포마케팅에 가깝다”고 일갈했다.
나아가 이 총재는 한국경제의 잠재성장률 둔화와 구조개혁 필요성도 함께 언급했다. 그는 한은이 지난달 발표한 수정 경제전망에서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0.9%로 제시한 것에 대해 “위기 상황이라기보단 잠재성장률이 떨어졌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재정·금융정책만으로는 구조개혁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정치적 리더십에 기반한 근본적인 개혁 추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결국 이 총재의 메시지는 금리나 스테이블코인 같은 단기적 변수에 집착하기보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개혁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점에 방점이 찍혀 있다.

투기 억제·공급 정책이 관건
정부의 부동산 정책 기조 또한 이 총재의 통화정책 철학과 궤를 같이한다. 이 총재가 금리만으로는 부동산 시장 안정을 담보할 수 없다고 강조한 것처럼, 정부 역시 투기 심리를 꺾고 공급 기반을 확충하는 직접적 수단에 초점을 맞췄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달 11일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대책을 낼 수밖에 없다”고 밝히며 대출 규제, 전세제도 개편, 주택공급 확대를 연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는 금리정책보다 구조적 해법을 중시하는 접근으로, 시장 안정화에 대한 중앙은행과 행정부의 인식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앞서 정부는 6·27 부동산 대책을 통해 수도권 및 규제지역 주택담보대출 상한을 6억원으로 제한하고, 생애 최초 대출의 담보인정비율(LTV)을 기존 80%에서 70%로 낮췄다. 여기에 6개월 내 전입 의무와 전세대출 보증비율 90%에서 80%로 축소하는 등 세부적 장치를 병행했다. 이후 불과 두 달여 만에 나온 9·7 대책에서는 오는 2030년까지 수도권에 135만 호를 신규 착공하겠다는 대규모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단기 수요 억제와 중장기 공급 확충을 동시에 겨냥한 투 트랙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금융위원회는 전세대출 한도를 일괄 2억원으로 낮추는 조치를 발표했다. 기존에는 보증기관별로 2억~3억원 사이로 제각각이었으나, 이를 단일화하면서 수도권 1주택자 약 5만2,000명 중 1만7,000여 명이 직격탄을 맞게 됐다. 평균적으로 약 6,500만원씩 대출 여력이 줄어들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전세자금 조달 구조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조치다. 아울러 규제지역 내 주택담보대출의 LTV 상한을 기존 50%에서 40%로 낮추면서 고가 아파트 중심의 과열 수요를 직접 겨냥했다.
다만 이 같은 조치에도 부동산 가격 상승세는 여전히 지속 중이다. 9월 둘째 주 기준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주 대비 0.09% 상승해 오름폭이 확대됐으며, 강남·서초·용산 등 핵심 지역의 가격 상승세 역시 뚜렷해 규제만으로는 불안 심리를 진정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적용 확대, 토지거래허가제 강화 등 추가 카드까지 만지작거리는 상황이다. 결국 이 총재가 강조한 바와 같이 금리 신호에만 의존하기보다는 투기 세력과 건설사의 기대를 꺾고, 공급 정책을 통한 구조적 해법을 병행해야 한다는 점이 더욱 분명해지는 형국이다.
해외 수요 부족·역외거래 제한 등 근본적 제약
스테이블코인 관련 발언에서도 이 총재의 시각은 시장과 전문가 평가에 힘을 얻는다. 그는 “국내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서둘러 발행해도 달러 기반 흐름을 바꾸기 어렵다”는 취지로 선을 그었는데, 최근 논의의 초점 역시 ‘통화 실험’ 자체가 아닌 원화의 기초 체력과 시장 인프라에 맞춘 단계적 접근에 있다. 외환·채권 인프라가 취약한 상태에서 발행을 서두르면 기대 대비 실효가 낮고, 준비자산 관리와 페깅(가치 연동) 유지 과정에서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는 경계심에서다. 국내 결제 편의 개선이라는 단기적 명분에도 불구하고 역외에서 원화 유통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으면 대외 신뢰를 얻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국책연구기관의 분석은 이러한 시각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12일 발간한 ‘지니어스법 통과와 스테이블코인: 국제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의 성공 여부는 결국 원화의 국제 경쟁력에 달려 있다”고 전제하면서 “원화의 역외 거래를 점진적으로 허용하고 단기 국고채를 도입하는 등 외환·채권시장의 인프라 선진화를 이뤄야 한다”고 진단했다. 준비자산 요건을 충족하려면 고유동성 단기채를 충분히 확보해야 하고, 역외 유통 창구가 열려 있어야 글로벌 결제·헤지 수요를 흡수할 수 있다는 논리다.
KIEP는 “2024년부터 해외 소재 금융기관의 국내 외환시장 참여가 가능해지고 거래 시간이 연장되는 등 부분적 개편이 진행 중”이라면서도 “역외 허용의 범위를 넓히고 단기 국고채 도입 제약을 풀어야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나아가 “디지털자산 규율의 법제화, 발행사의 정보 공시·회계감사 의무, 자본·유동성 규제와 정기 스트레스 테스트 등 거시건전성 감독 장치를 병행해야 ‘코인런(대규모 인출 사태)’이 금융시장 전반으로 번지는 전이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민간 컨퍼런스에서 제기된 시각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피터 정 프레스토 리서치센터 수석 연구원은 10일 서울 강남구 슈피겐HQ 슈피겐홀에서 열린 ‘BTCON Seoul 2025’에서 한국이 스테이블코인을 확산하기 위한 방안으로 원화 활성화를 강조했다. 그는 “블록체인 상에서 통용되는 자산은 전 세계가 원하고 신뢰하는 자산이어야 한다”며 “현시점에서 달러와 금 정도만이 그 기준을 안정적으로 충족한다”고 평가했다. 정책 일관성과 시장 신뢰가 확보될 때 비로소 국내 결제 보완재를 넘어 역외 수요까지 아우르는 실질적 확산이 가능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