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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나란히 스테이블코인 제도권 편입 법안 발의 발행사에 '자기자본 50억원' 조건 내걸려, 시장 진입장벽 강화 한은, 감시 체계 재정비 착수

국내에서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를 직접 겨냥한 법안이 최초 발의됐다. 법안에는 사업자 인가를 위한 자기자본 기준 등을 대폭 상향 조정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스테이블코인 시장 진입 난이도가 눈에 띄게 높아진 것이다. 이에 시장에서는 그간 과열됐던 금융권의 '시장 선점 경쟁'이 한풀 꺾일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는 추세다.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속도 붙어
28일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스테이블코인의 제도권 편입을 구체화하는 ‘가치안정형 디지털자산의 발행 및 유통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이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활용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구체화한 법안이다. 안 의원은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시대 통화 주권의 최전선"이라며 "디지털 달러를 앞세운 미국처럼, 우리도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으로 새로운 디지털 금융 시대를 열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안 의원의 법안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 발행 사업자는 반드시 금융위원회의 사전 인가를 받아야 한다. 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금융기관이나 상법상 주식회사의 지위를 갖추고, 50억원 이상의 자기자본을 보유할 필요가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때는 △총발행 한도 △유통 계획 △준비 자산의 구성과 상환 방식 등을 담은 백서를 금융위에 사전 신고해야 한다. 아울러 모든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현금이나 요구불예금, 잔존 만기 1년 이내의 국채 등 유동성이 높은 실물 자산을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잔액의 100% 이상 규모로 확보할 의무를 지닌다. 발행인이 파산할 시 준비자산은 이용자 상환에 우선 배정된다.
스테이블코인의 예금화와 이로 인한 시장 교란을 막기 위해 이자 지급은 전면 금지된다. 시장 질서 훼손이 우려될 때는 금융위가 긴급조치권을 발동할 수 있으며, 한은은 통화 정책 수행 목적에 따라 금융위에 자료 제출·공동 검사를 요구할 수 있다. 기획재정부도 외환시장 질서유지 등을 위해 유사한 권한을 지닌다.
같은 날 국민의힘에서는 김은혜 의원이 ‘가치고정형 디지털자산을 활용한 지급 혁신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김 의원 법안도 스테이블코인 발행업 인가 기준, 백서 제출 의무, 준비자산 구성 의무를 규율하는 등 안 의원 법안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과열된 시장 진정될까
시장은 여야가 엄격한 인가 기준 등을 앞세워 스테이블코인 발행 허들을 높였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법안 통과를 기점으로 과열된 시장 분위기가 가라앉을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국내 금융권은 정부의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움직임이 본격화한 이후 시장 선점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여 왔다. 특허정보 검색서비스 키프리스에 따르면, 현재 원화 스테이블코인 관련 상표 출원 건수는 275건, 출원 주체는 약 23곳에 달한다. 토스뱅크는 'KRWTBK', 'KRWTSB', 'TSKRW' 등 포함해 총 48건의 상표를 출원했고, 신한금융지주는 21건을 등록했다. 카카오페이 역시 원화를 포함한 스테이블코인 상표를 총 18건 출원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지급결제 기능 탑재 역시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최근 신한은행은 스테이블코인 기반 지급결제에 대한 PoC를 추진하기로 했다. PoC는 본격적인 서비스 도입에 앞서 기술이나 사업 모델의 실현 가능성을 실험·검토하는 절차다. 신한은행은 향후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고, 이를 자사 배달 앱인 '땡겨요' 결제에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KB국민은행을 비롯한 다른 시중은행들도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위한 PoC 추진을 검토 중이며, 은행권 공동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추진 중인 오픈블록체인·DID협회(OBDIA) 역시 세부 사업 방안 수립 작업에 착수했다.
산업계도 예금 토큰의 발행·결제 서비스 상용화를 위한 기술을 개발하는 등 대응책 마련에 분주하다. 일례로 삼성 SDS와 LG CNS는 기술 플랫폼 측면에서 블록체인 인프라 구축 역량을 선점하며 금융권과 연계된 사업 기반을 확보 중이다. 다날과 카카오페이는 소비자(리테일) 중심의 온체인 결제 서비스를 마련하며 QR 결제, 개인 간 직접거래(P2P) 송금 등 스테이블코인의 실생활 적용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한은도 '가상자산반' 신설
업계에서는 이 같은 열기가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는 추세다. 국회에 이어 한은까지 스테이블코인 시장 감시 강화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탓이다. 28일 한은은 하반기 정기인사에서 지급결제제도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금융결제국에 가상자산반을 새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가상자산반은 금융결제국의 전자금융팀이 수행하던 업무를 도맡아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비롯한 가상자산 시장에 대한 모니터링, 입법 논의 등을 전담할 예정이다.
아울러 한은은 기존 디지털화폐연구실의 명칭을 디지털화폐실로 바꾸고 역할을 구체화했다. 디지털화폐기술 1팀은 디지털화폐기술팀, 디지털화폐2팀은 디지털화폐인프라팀으로 각각 정비했다. 디지털화폐기술팀은 디지털화폐 관련 IT 조사·연구와 개인정보 보호 기술을 담당하고, 디지털화폐인프라팀은 예금토큰 기반 디지털 바우처 관리 플랫폼 사업과 예금토큰 활용성 테스트 플랫폼 구축 사업을 주관한다.
이처럼 한은이 스테이블코인 관련 체계 정비에 힘을 쏟는 것은 중앙은행으로서 스테이블코인이 통화 정책에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은은 스테이블코인의 혁신성은 인정하지만, 금융 안정성을 위해 부작용을 철저히 검토하고 은행부터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고경철 한은 전자금융팀장은 지난 23일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중앙은행이 통화 신용 정책을 수행할 때 관여할 수 없는 부분에 통화가 나오게 되면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려 섞인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