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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식 'CEO 리더십'에 美 경제 시스템 변화 예고 관세·약값·물가 등 경제 현안에 전례 없는 직접 개입 공화당이 고수해 온 전통적 자유시장 원칙과도 충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권 2기 들어 관세, 약값, 소비자물가 등 핵심 경제 현안에 대해 전례 없는 방식으로 직접 개입하고 있다. 그는 월마트, 포드, 아마존, 마텔 등 대형 기업들을 향해 가격 인상을 중단하라고 공개 압박하는가 하면, 제약회사를 대상으로 약값 인하를 강제하는 행정명령까지 단행하며 시장에 강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미국 경제를 '내가 운영하는 거대한 상점'이라고 지칭한 그의 발언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기업과 시장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는 강한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관세로 인한 물가 상승 우려에 기업들 압박
26일(현지 시각) 야후파이낸스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7일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월마트와 중국은 관세를 감수하고 소비자에게 단 1센트도 전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포드에게는 "차량 가격을 올린다면 아무도 차를 사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고, 장난감 제조업체 마텔에게는 "가격을 올린다면 장난감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압박했다. 지난달 29일에는 아마존이 상품에 관세 비용을 별도로 표기하겠다고 발표하자,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적대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라고 비난했다.
야후파이낸스는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에 대해 "관세로 인한 물가 인상을 우려한 조치로 미국 소비자가 체감하는 가격 상승이 행정부 내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현재는 최고경영자(CEO)를 향한 공개적 압박에 집중하고 있지만, 필요할 경우 추가 조치를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했다. 미 연방거래위원회(FTC)의 산업 전반에 대한 조사, 특정 제품 및 기업 수익에 대한 조사, 의회 차원의 입법 추진, 심지어 행정명령을 통한 가격 통제 등이 후속 조치로 검토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처럼 특정 기업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은 'CEO형 대통령'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체성에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 이후 관세 인상, 기업의 생산지 이전, 소비자 가격 인상 등 주요 경제 사안에 직접 개입하고 있다"며 "그의 일방적인 결정이 미국 경제 시스템을 재편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경제는 거대한 아름다운 상점이며, 내가 상점을 소유하고 가격을 정한다"며 경제 시스템 전반에 대해 강한 통제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제약회사에겐 '공공의료' 예산 삭감분 전가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은 비단 제조·유통 기업에만 그치지 않았다. 지난 12일 트럼프 대통령은 제약회사들이 미국 내 처방약 가격을 인하하지 않으면 연방정부가 지불하는 약값에 상한선을 설정하는 내용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는 미국의 약값을 유럽 등과 유사한 수준으로 낮추기 위한 조치로 오는 30일까지를 기한으로 제약회사에 가격 인하에 합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기한 내 합의하지 않을 경우,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은 미국의 약값을 다른 국가의 낮은 약값에 연동하는 새 규정을 마련할 예정이다.
제약업계에서는 이번 행정명령이 공공의료 예산 삭감분을 약값 인하로 보전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미 연방정부는 메디케어(65세 이상 건강보험)와 메디케이드(극빈층 의료보호)를 통해 의약품 가격에 대해 강력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공화당이 주도하는 하원이 메디케이드 예산을 8,800억 달러 삭감한다는 새로운 계획을 발표한 지 몇 시간 만에 트럼프 대통령은 약값 인하 방침을 내놨다. 즉, 정부가 직접 지출하는 공공의료 예산의 감축으로 국민의 의료비 부담이 커질 것을 우려해 약값 자체를 낮추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미국 주요 제약회사를 대표하는 로비 단체들은 즉각 반발했다. 제약회사들은 그동안 연방정부의 과도한 약값 규제가 신약 개발에 필요한 투자를 위축시키고, 환자들에게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PHRMA 회장 겸 CEO인 스티븐 J. 유블은 이번 행정명령을 두고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정책"이라며 "외국의 약값을 미국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미국 환자와 근로자 모두에게 불리하다"고 반박했다. 약값 규제가 신약 개발을 위축시키고,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미국 투자도 저해할 것이란 주장이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을 통해 제약회사의 강력한 로비 활동을 언급하며 “선거자금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지만, 나와 공화당에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제약회사들이 동일한 약을 미국에서 최소 5배에서 최대 10배까지 비싸게 팔고 있다"며 "미국은 더 이상 제약회사의 호구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만약 제약회사들이 가격 인하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연방정부가 가격 책정에 대한 관행을 조사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수입된 약물을 더 많이 들여오기 위해 시장을 개방하겠다고 위협했다.
대선 기간에는 민주당 가격 억제 공약 비판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는 공화당이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자유시장 기조와 상충한다.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정부의 개입보다는 규제 완화를 통한 시장 활성화를 지지하며, 정부의 과도한 세금과 규제가 성장을 저해한다고 주장해 왔다. 일례로 과거 공화당의 대표적인 경제 정책가였던 폴 라이언 전 하원의원은 2012년 “중앙 기획자들의 통제와 위선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케빈 매카시 전 하원 원내대표도 지난 2013년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의 기후 정책에 대해 “정부가 승자와 패자를 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흥미롭게도 트럼프 대통령 본인 역시 지난해 대선 유세 기간에는 민주당과 카멀라 해리스 후보의 경제 공약을 '공산주의적 발상'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해리스 부통령은 치솟은 물가를 안정시켜 중산층의 생활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저렴한 주택 공급 확대, 식료품 등 생필품 가격 억제, 의료비 부담 경감 등을 약속했다. 또 자녀 세액공제를 확대해 저소득·중산층 가정에 실질적인 현금 지원 효과를 주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이는 유권자의 최대 관심사인 인플레이션 개선과 물가 안정에 대응하기 위한 공약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후보는 이를 "베네수엘라나 구소련에서나 시행할 법한 정책”이라고 비하하며 시장의 자율적 조정에 무게를 둔 전통적 공화당 노선을 재확인했다. 그는 "민주당과 해리스 후보는 가격 통제를 원하고, 그것이 효과가 있다면 나는 전적으로 따라갈 것"이라며 "하지만 그 정책은 오히려 정반대의 영향과 효과를 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부통령인 해리스 후보는 정책 실현 권한을 갖고 있는데 왜 지금 하지 않느냐"며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공약한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