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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스티브 미란 CEA 위원장 보고서 첫 등장 동맹국의 美 초장기 국채 매수로 재정 적자 해결 주장 국채 금리 낮춰 弱달러 해소, 제2의 플라자 합의 검토

최근 월가와 국제금융계를 중심으로 '마러라고 합의(Mar-a-Lago Accord)'가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가운데, 그 실현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과 맞물려 그의 경제참모가 제시한 대외경제 전략 시나리오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해당 보고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구축한 세계 금융 질서를 완전히 재편하는 새로운 구상을 담고 있으며 여기에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재정·경상수지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달러 약세 유도 방안도 포함돼 있다.
NYT "달러 가치 조정하는 다자간 협의 검토"
14일(현지시각) 뉴욕타임스(NYT) 등 현지 언론들은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달러 가치를 조정하는 다자간 협의인 마러라고 합의를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마러라고는 트럼프 대통령이 소유한 플로리다 팜비치 소재 리조트로,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각국의 귀빈이 방문하는 세계 정치의 허브로 기능하고 있다. 마러라고 합의는 백악관 대통령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으로 취임한 스티브 미란이 작년 11월 허드슨베이캐피털 수석 전략가 재직 중 발표한 '세계 무역 시스템 재편을 위한 사용자 안내서에서 처음 제시된 개념이다.
미란 위원장은 보고서에서 "강(强)달러로 인해 발생한 미국의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동맹국이 비용을 일정 부분 분담해야 한다"며 "동맹국들이 보유한 10년 이하의 단기 미국 국채를 팔고 100년 만기의 초장기 국채를 매입하도록 유도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새로 발행될 초장기 국채는 이자율이 무이자에 가까워야 한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이는 고금리 시절 발행한 국채의 이자 부담을 줄여 미국의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것이다. 장기물 수요를 늘려 금리 상승 압력을 완화하고 미국 달러 강세를 억제하는 것도 주된 목표 중 하나다.
미란 위원장은 이와 함께 동맹국들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해 관세와 안보를 외교적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과거 2018~2019년 중국과의 무역전쟁 당시 도입했던 고율 관세가 인플레이션 유발 없이 세수를 증가시켰다고 주장하며, 국가별 관세의 최적 수준을 20%로 제시했다. 미란 위원장은 동맹국이 영구채 등을 무이자로 매입하면 달러화는 이자 부담 없이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고, 동시에 강달러를 해소해 무역 균형이 회복되면 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작아져 재정 건전성이 개선될 것으로 봤다.
달러 패권 지키면서 트리핀 딜레마 해소 목표
미란 위원장의 보고서가 제시한 전략 목표는 세 가지다. 구조적인 강달러를 해소하고, 미국 제조업을 부흥시키며, 동시에 기축통화국으로서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동안 역대 미국 정부가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은 세 가지 목표가 상충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 세계에 준비자산인 달러를 공급하는 나라로, 항공기나 자동차 같은 실물재가 아닌 국채를 수출하며 적자를 감수한다. 일반적으로 적자가 많은 나라는 통화가치가 하락해 수출이 늘어나지만, 미국은 이러한 조정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지속적인 적자를 감당해야 하는 '트리핀의 딜레마'에 처해 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연방 예산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올해 2월 기준 미국의 국가 부채는 36조2,000억 달러(약 5경1,700조원)로 15년 새 2배로 증가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달러를 풀어 경기를 방어한 결과다. 과도한 유동성은 인플레이션을 자극해 금리를 밀어 올렸고, 부채에 대한 이자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연방정부가 보유한 채권의 평균 이자율은 2021년 1.61%에서 현재 3.28%로 두 배 이상 올랐다. 연간 이자 부담만 1조1,580억 달러(약 1,653조원)로 미국 국방예산(8,860억 달러·약 1,265조원)을 가뿐히 넘어섰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경제팀은 채권 금리가 최우선 관심사임을 수차례 밝혀 왔다. 출범 80여 일 동안 오락가락 관세 정책으로 월가를 흔들었지만, 정작 주식시장에는 관심이 없다는 반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4일 의회 연설에서도 "국채 금리가 아름답게 큰 폭으로 하락했다"고 언급했고,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도 "10년 만기 국채 금리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를 낮추기 위한 조치를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올해 초 연 4.8%까지 올랐다가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연 4.2% 언저리에서 움직이고 있다.

마러라고 합의 실현 가능성 두고는 의견 엇갈려
시장에서는 만약 마러라고 합의가 현실화한다면 '플라자 합의'와 유사한 방식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주요국들이 다자간 합의를 근거해 외환시장에 개입함으로써 달러 약세를 유도하는 것이다. 플라자 합의는 1985년 9월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이 참여한 환율 조정 협정으로, 각국이 달러를 매도하고 자국 통화를 매수하는 방식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했다. 당시 미국은 강달러로 인한 무역적자를 해소하려 했고, 다른 선진국들은 자국 통화가치의 하락을 막기 위해 과도한 긴축정책으로 경기 침체를 겪고 있었다.
합의 이후 엔화와 마르크화 가치는 2년 동안 50% 넘게 절상됐고 달러화는 큰 폭으로 하락했다. 특히 일본 경제에는 장기적인 부작용을 야기했다. 합의 직전 달러당 250엔이던 엔화는 120엔까지 올랐는데, 이에 대응하기 위해 펼친 저금리 정책은 유동성 과잉을 초래해 부동산과 주식 시장에 버블을 유발했다. 이후 1989년 기준금리 인상과 부동산 규제 강화로 버블이 붕괴했고 엔고로 자동차, 전자제품 등 수출이 감소했다.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10년'에 접어든 일본은 현재까지도 침체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이 합의가 현실화된다면 우리나라 경제에도 복합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단기적으로는 원화 강세에 따른 수입 물가 하락과 내수 시장의 물가 안정, 수입 원자재 가격 인하에 따른 생산비 절감 등이 기대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득보다 실이 더 클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관세와 환율 정책이 병행되는 과정에서 국내 생산시설이 미국으로 옮겨갈 경우 국내 일자리 감소와 수출 둔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외환보유고가 미국 장기채 중심으로 재편돼 환율 급변 등 위기 상황에서 즉시 현금화 가능한 자산이 줄어들 수도 있다.
다만 마러라고 합의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성사 가능성을 낮다는 입장에서는 플라자 합의와 달리 현재 주요국 경제 상황이 불안정해 동참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지적한다. 미란 위원장도 "보고서가 실행되면 브레턴우즈 체제의 출범과 종말에 비견될 정도로 중대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관세 압박만으로 동맹국이 비용 분담에 동의할지 미지수"라고 밝혔다. 반면 성사 가능성을 높게 보는 측에선 동맹국이 관세 부담과 합의 참여로 인한 비용을 비교해 현실적인 선택을 할 경우, 각국과의 협상을 거쳐 어느 정도 수정된 형태로라도 추진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