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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정부 정책이 국채 신뢰도 저해
각국 금리 조절 등 연쇄효과 불가피
연준 독립성 훼손 및 인플레이션 우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제 정책이 세계 각국의 주요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고율 관세 정책과 자국 중앙은행의 자율성을 침해하려는 시도가 미국 국채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단 평가다. 특히 미국 국채 보유량이 많은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더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아시아 국가들 줄줄이 금리 동결
25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트럼프 대통령의 급격한 관세 부과 계획이 달러와 미국 국채에 대한 신뢰를 위협하고, 아시아 주요국 경제국들을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과 중국의 경우 1조8,000억 달러(약 2,635조원)가 넘는 미국 정부 부채를 보유하고 있어 금리 조절 등 연쇄효과가 불가피하단 지적이다.
그러면서 닛케이는 일본의 사례를 들었다. 일본은행은 지난 2월 인플레이션율이 애초 목표치의 거의 두 배인 3.7%까지 치솟았음에도 3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금리 동결을 결정했다. 일본은행은 “각국 통화정책 움직임과 그 영향을 받은 경제 및 물가 동향 등 일본 경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라고 금리 동결 이유를 밝혔다. 미국의 관세 압력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수출 중심 국가인 일본 입장에선 상황을 더 예의주시하겠단 설명이다.
중국 또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미국 국채 수익률이 불안정할수록 중국의 성장 촉진에 필요한 금리 인하를 지연시킬 가능성이 농후한 탓이다. 이 경우, 위안화 가치 하락으로 이어져 미국과의 마찰이 빚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위안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조작한다고 판단될 경우,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60%에서 100%로 상향 조정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한국은행도 미국의 행보를 예의주시하는 모습이다. 한은은 연준이 지난 19일(이하 현지시각) 기준금리를 연 4.25~4.50%로 동결한다고 밝힌 직후 ‘시장상황 점검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유상대 한은 부총재는 “연준의 통화정책 경로, 관세정책 등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어 향후 (한은의) 통화정책은 이런 효과를 지켜보며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대외 리스크에 국내 정치·경제 상황과 맞물리면서 국내 금융·외환시장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경계감을 가지고 점검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글로벌 금융시장 ‘상호관세 충격’ 준비 태세
이런 가운데 오는 4월 2일 발표 예정인 미국의 상호 관세율이 예상보다 훨씬 높게 책정돼 시장에 부정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는 분석까지 제기됐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많은 교역 상대국이 비관세 장벽을 이용해 미국과 불공정한 거래를 이어 왔다고 주장하며 상호 관세를 적용하는 내달 2일이 ‘미국 해방의 날’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 최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알렉 필립스 경제학자는 25일 투자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최근 조사에서 시장은 초기 관세율을 9% 수준으로 예상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 두 배에 달할 수 있다”며 “이번 초기 관세가 협상을 전제로 설정되는 만큼 높게 책정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초기 관세를 협상의 출발점으로 삼아 실제 목표치보다 다소 높은 수치를 제시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골드만삭스는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할 상호 관세율이 대체로 10% 수준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최대 15%까지 부과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미국의 관세율은 3% 수준이다. 필립스 경제학자는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에 대한 발언 수위를 조절하고 있으나, 상호 관세는 미국과 교역하는 거의 모든 품목에 적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호 관세 외에도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수입하는 국가에 대한 25% 관세 부과 방안, 미국산 제품에 대한 부가가치세(VAT)가 차별적이라는 주장, 그리고 환율 저평가를 관세 산정 기준에 포함하는 방안 등을 거론하며 시장에 추가적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다. 다만 협상 가능성에 대해서는 문을 열어뒀다. 그는 24일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생각보다 많은 국가에 면제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경기 위축을 우려한 몇몇 국가는 앞다퉈 금리 인하에 나섰다. 인도 중앙은행은 이달 7일 기준금리를 0.25%p 내린 6.25%로 결정한다고 밝혔다. 인도가 기준금리를 내린 건 2020년 5월 이후 처음이다. 이를 두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인도 수출의 5분의 1이 미국으로 향하는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와의 무역 마찰이 발생할 경우 경기가 둔화할 수 있다고 보고 선제 대응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영국과 멕시코도 기준금리를 각각 0.25%p, 멕시코는 0.5%p 내렸으며, 이에 앞선 지난달 29일에는 유럽연합(EU)과 캐나다가 기준금리를 0.25%p씩 낮췄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글로벌 무역 마찰이 심화하면 유로존 수출이 위축되고, 이는 경제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금리 인하 중단 시점을 논의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중앙은행 정책 결정 관여 시도 계속
미국 내부의 우려도 짙어지는 양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선거 유세 당시 “연준의 업무와 관련해 대통령에게도 발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통화정책으로 인플레이션과 싸우는 중앙은행이 잘 기능하려면, 철저한 독립성이 전제돼야 한다는 게 전 세계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내 직감이 연준 이사회나 의장보다 좋은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파월 의장이 정책 결정 시점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비판이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선거 전 금리를 내리지 말라”며 연준을 공개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준은 같은 해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를 0.5%p 인하하는, 이른바 ‘빅컷’을 단행했다.
전문가들은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해치는 것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은다.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역임한 재러드 번스타인은 “통화정책의 역사에서 정치권이 중앙은행의 업무에 개입할 때마다 정말 끔찍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 이민자 추방, 부자를 위한 대규모 감세 아이디어가 금리 조정과 결합한다면, 인플레이션은 매우 가속할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