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유럽 재정 압박과 인플레이션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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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물가는 안정세지만 재정적자와 부채 부담은 확대 국방비와 복지 지출 증가로 재정 압박 심화 설득력 있는 재정 계획 부재 시 인플레이션 재확산 위험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10년 재정위기에 직면한 그리스는 대규모 예산 삭감을 통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약 5%포인트의 재정적자를 줄였다. 세금 인상과 지출 축소 규모는 GDP의 11%에 달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뒤인 2013년, 그리스 경제는 급격한 침체를 겪었다. 이 사례는 정부가 수요를 억제하고 신뢰를 회복하면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최근 상황도 경고 신호를 보낸다. 2023년 GDP 대비 5.5%의 재정적자를 기록한 프랑스는 신용등급 강등과 함께 국채금리 부담이 확대됐다. 현재 유로존의 조화소비자물가지수(HICP)는 2.0%, 독일은 2.2%, 영국은 3.8% 수준이지만, 재정 불확실성이 지속된다면 물가 상승 압력은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다. 역사는 같은 결론을 남긴다. 느슨한 재정은 인플레이션을 키우고, 단호한 긴축만이 물가를 억제한다.

역사에서 얻는 교훈
1970년대 영국은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1975년 물가는 24%까지 치솟았고, 영국은 결국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에서 39억 달러(약 5조1,000억원)의 구제금융을 받으며 긴축을 약속해야 했다. 당시 위기의 원인은 오일 쇼크만이 아니었다. 허술한 재정 운영과 고평가된 파운드에 집착한 정치가 대외 신뢰를 무너뜨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주: 연도(X축), 전년 동월 대비 소비자물가 상승률(Y축)/음영 구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호황과 붕괴, 한국 전쟁, 1970년대 대 인플레이션, 코로나19 팬데믹
이 경험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부채가 많고 복지 지출이 큰 나라에서는 통화정책만으로는 물가를 안정시키기 어렵다. 재정 건전성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임금 협상과 국채 금리가 안정되고, 그 결과 물가도 진정된다. 1970년대 영국의 사례는 금리 인상만으로는 부족하며, 재정 전환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당시에도 인플레이션은 공급 충격과 일시적 요인으로 설명됐다. 그러나 물가의 지속 여부를 결정한 것은 재정 운영이었다. 건전성을 외면한 국가는 인플레이션이 장기화됐고, 긴축을 통해 신뢰를 회복한 국가는 물가가 빠르게 안정됐다. 국제결제은행(BIS)이 현재 재정 건전화를 절대적 우선순위로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연구는 건전화 계획 발표만으로도 중기 인플레이션 기대가 낮아진다고 밝힌다. 유럽연합이 2024년 4월 도입한 새 재정 규율 역시 투자와 부채의 균형을 맞춘 중기 계획을 의무화한 것으로, 사실상 인플레이션 대응 정책이다.

주: 연도(X축), 인플레이션 기대치(Y축)/하늘색 구간-파운드화 평가절하, 노동 개혁 실패, 바버 경기부양 & 파운드 변동환율제 도입, 힐리 재정 긴축 및 IMF 방문 이후, 하우 1981 예산안, 라몬트/클라크 재정 긴축, 주황색 선-가계 1년 후 인플레이션 기대
유럽 재정의 새 현실
프랑스의 소비자물가지수는 2025년 봄 한때 1%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재정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팬데믹 이전보다 적자가 커졌고, 부채 비율도 여전히 높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027년에도 유로 지역 재정적자가 GDP 대비 3.3%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는데, 이는 2019년 0.5%와 비교하면 큰 폭의 악화다. 프랑스는 2023년 5.5% 적자로 2024년 5월 S&P 신용등급이 강등됐으며, 2025년 말에는 10년물 국채금리가 이탈리아와 같아졌다. 시장이 프랑스를 더 이상 독일이나 네덜란드와 같은 신뢰 수준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재정 압박에는 두 가지 요인이 크다. 첫째는 국방비다. 2024년에는 나토 회원국 18개국이 GDP 대비 2% 방위비 기준을 충족할 것으로 예상됐다. 독일도 같은 수준에 근접했으며, 향후 5년간 수천억 유로를 투입할 계획이다. 둘째는 복지 지출이다. 프랑스의 사회보장 지출은 GDP 대비 31%로 OECD 최고 수준이며, EU 평균 26~27%를 크게 웃돈다. 부채 이자, 연금, 국방비가 이미 고정돼 있어 다른 지출을 줄이지 않는 한 재정 압박은 계속된다.
결정을 미루면 결과는 명확하다. 중앙은행은 정치적 압력에 제약을 받고, 금리는 높은 수준에서 장기화되며, 기대 인플레이션은 다시 상승한다. 단기적으로 지출 확대는 유혹적일 수 있으나, 그 대가는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긴축과 성장 사이의 선택
긴축이 성장을 해친다는 비판은 꾸준하다. 실제로 그리스의 사례는 과도한 긴축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다. 2010년대 초 구제금융 조건으로 추진된 재정 삭감은 행정 역량을 약화시켰고, 그 결과 GDP는 급락하고 청년실업은 급등했다. 교훈은 명확하다. 긴축을 무조건 피할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정을 설계하고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유럽연합이 2024년에 마련한 새로운 재정 규율도 같은 방향이다. 부채가 개선되는 범위 내에서 투자는 허용하되, 무리한 삭감은 지양하도록 했다.
현실적으로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세수를 늘리거나 광범위한 보조금을 줄이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를 회피하면 위험 프리미엄이 높아지고, 인플레이션은 고착된다.
일부에서는 이미 물가가 안정됐으니 예산 논의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데이터는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유로 지역의 2%대 물가는 어렵게 달성한 수준이며, 방심할 경우 언제든 되돌려질 수 있다. 영국은 여전히 3.8%로 높은 물가를 기록한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022년 재량적 재정정책이 물가를 1.5%포인트 상승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위기 대응은 불가피했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연장한 것도 사실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은 디스인플레이션을 끝까지 추진해야 금리가 정상화되고, 이자 부담이 줄며, 안정적인 거시 환경이 조성된다고 강조한다.
재정 계획의 신뢰성
그리스의 사례는 재정 긴축이 물가를 빠르게 낮출 수 있지만 사회적 비용이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 영국은 정치적 합의가 늦어질 경우 통화 긴축만으로는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현재 유럽도 구조는 다르지만,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재정적자는 여전히 크고, 국방비와 복지 지출은 늘어나며, 차입 비용은 줄지 않고 있다.
해법은 분명하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신뢰할 수 있고 시장이 납득할 수 있는 재정 계획을 마련해 이행하는 것이다. 성장 잠재력을 높이지 못하는 광범위한 보조금은 줄이고, 장기 생산성을 뒷받침하는 투자는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조정이 이뤄져야 마지막 디스인플레이션 구간이 안정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위험 프리미엄과 장기 금리는 높은 수준에서 지속되고, 인플레이션 압력은 다시 커질 수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Europe's Inflation Problem Is a Budget Problem, and Schools Will Feel It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