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바트화 ‘나홀로 강세’, 투기성 자금 의혹에 아시아 금융시장 불안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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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화 강세에 핵심 산업 위기 직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유사성
반복된 투기성 자금 유입 사례

태국 바트화가 이달 들어 4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으며 현지 산업 전반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금 거래와 경상수지 흑자가 표면적 원인으로 거론되지만, 5,000억 바트(약 21조8,000억원) 규모의 불법 자금 유입 가능성이 짙어지면서 시장 불안은 갈수록 커지는 모양새다. 전문가들 역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7년 투기성 단기자금 유입 사례를 떠올리며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자금, 1년 새 3배 급증
24일(이하 현지시각)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태국 바트화는 이달 들어 4년 만에 고점을 찍을 만큼 강세를 기록 중이다. 달러 대비 가치는 연초와 비교해 8% 이상 뛰었는데, 원화·엔화 등 주요 아시아 통화가 줄줄이 약세를 보이는 와중 바트화 홀로 치솟으며 ‘이상 급등’ 양상을 보이고 있다. 태국 중앙은행은 금 거래와 경상수지 흑자를 바트화 강세의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시장 전문가 사이에선 금값 상승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시장에서는 바트화 급등의 이면에 대규모 불법 자금 유입이 있다고 본다. 로이터 역시 “동남아시아를 기반으로 한 범죄 조직이 암호화폐 등 불법 자금을 태국으로 들여와 바트화로 환전한 뒤 금·부동산 같은 실물 자산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돈세탁을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태국 국제수지의 ‘순오차 및 누락(NEO)’ 항목은 2023년 1,804억 바트(약 56억 달러·7조8,000억원)에서 2024년 5,308억 바트(약 165억 달러·23조원)로 세 배 이상 급증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자금이 갑자기 불어난 만큼, 제도권 외 유입 자금이 바트화 강세를 자극했다는 게 시장 전반의 해석이다.
바트화의 강세는 태국 핵심 산업의 위기로 이어졌다. 특히 태국 국내총생산(GDP)의 18%를 차지하는 관광업은 환율 부담이 커지면서 직격타를 맞았다. 태국 관광청의 집계에서 올해 1월부터 이달 21일까지 외국인 관광객 수는 2,345만 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7.44% 감소했다. 달러 약세가 겹치면서 미국인 관광객이 5월부터 줄기 시작했고, 중국 관광객은 일본·베트남으로 눈을 돌리는 사례가 늘었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이유로 올해 태국의 관광 수입은 당국의 목표치보다 15~17% 낮은 수준에 그칠 전망이다.
태국 변동환율제 전환→IMF 외환 위기
전문가들은 이번 바트화 강세가 보이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당시 태국 바트화는 장기간 고평가된 상태였고, 이를 노린 국제 헤지펀드와 외환 딜러들이 집단으로 공격에 나선 상황이었다. 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 줄리안 로버트슨의 타이거펀드 같은 월가 거물 헤지펀드들을 필두로 JP모건·씨티은행 등 다수의 글로벌 은행 외환 데스크가 가세했고, 이들 기관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바트를 한꺼번에 매도하며 환율 폭락에 베팅했다.
당시 환율은 1달러당 26바트 수준이었는데, 투기세력은 28~30바트로 급등할 것을 기대했다. 단기 시세 차익만으로도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구조였다. 초기에는 태국 중앙은행의 강력한 방어가 버팀목이 됐다. 중앙은행은 외환보유고에서 150억~200억 달러(약 21조~28조원)를 투입하며 시장 개입에 나섰고, 싱가포르·말레이시아·홍콩 등 인접국 중앙은행과 공조해 추가로 120억 달러를 풀었다. 이후 환율은 즉시 안정세를 보였고, 같은 해 6월에는 달러당 24바트까지 되레 절상되는 상황도 벌어졌다. 환율 폭락에 베팅한 헤지펀드와 외환 딜러들의 손해 역시 막대했다.
표면적으로 태국 중앙은행이 승리한 듯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870억 달러(약 122조원) 규모의 외화부채라는 근본적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에 투기세력은 태국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고, 결국 그해 7월 태국은 변동환율제로 전환하며 방어를 포기했다. 이후 태국의 위기는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금융 시장이 연쇄적으로 붕괴하는 역사적 사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로 이어졌다.
최근의 바트화 강세를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 금 거래나 경상수지 흑자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1997년처럼 투기자본이 의도적으로 환율을 끌어올린 뒤 급격한 반전을 노리는 데 따른 결과라면 그 파급력은 1997년보다 훨씬 클 것이란 관측에서다.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글로벌 자본 이동 속도는 태국 금융당국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빨라졌고, 바트화 강세는 단순 경제 현상을 넘어 다시 한번 아시아 금융시장의 뇌관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시각이다.

지역 금융 불안↑, 불확실성 증대
비슷한 위기의식은 지난 2007년에도 한 차례 확산한 바 있다. 당시 태국 바트화는 연간 9%가량 절상되며 동아시아 신흥시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환율 강세를 보였다. 그 배경에는 미국 달러 약세에 힘입은 대규모 단기 자금 유입이 있었다. 투자자들은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한 태국 시장에서 단기 환차익을 노렸고, 그 결과 바트화는 급격히 절상됐다. 이처럼 태국은 외부 자본의 급격한 유입과 유출이 반복되는 구조적 취약성을 또 한 번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태국 중앙은행은 2006년 말부터 일련의 조치를 시행했다. 외국인 자금의 30%를 의무적으로 예치하게 하는 제도, 채권·주식 거래 제한, 해외투자 상한선 확대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오히려 시장 불신을 자극하며 주식시장을 폭락시켰다. 일시적으로 환율은 안정됐지만, 예측 불가능한 정책이 반복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태국을 위험 시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단기적 충격을 잠재우는 데 급급해 근본적 대응은커녕 불안 심리만 증폭시킨 셈이었다.
당시 충격은 태국 금융시장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원화와 엔화 등 주요 통화가 동반 절상되면서 한국과 일본의 수출 경쟁력에도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쳤고, 기업의 수익성 악화와 내수 회복 동력 위축 등 각종 부작용을 낳았다. 이처럼 태국의 불안정한 외환정책과 단기자본 유입은 동아시아 전체 시장에 파급되며 지역 금융 불안을 키웠고, 이듬해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와 맞물리면서 국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는 태국이 세계 금융시장 안정성과 직결되는 ‘허약한 고리’라는 사실을 재확인한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