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반응 느린 연준, 금리인하 서둘러야”
아시아 주요국 일제히 대응책 마련 나서
한은, 대출 증가 우려에 금리인하 신중

미국 행정부의 상호 관세 발표로 전 세계 주식시장이 폭락을 거듭하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방준비제도(연준·Fed)에 기준금리 인하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간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조해 오던 전문가들도 금리인하가 시급하다는 데는 트럼프 대통령과 뜻이 일치했다.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도 관세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금리인하와 추경 편성 등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증시→선물 시장, 연이은 폭락
7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증시 선물 시장에서는 큰 폭의 하락장이 연출됐다. 다우 선물은 3.9% 떨어졌으며,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선물은 4.2%, 나스닥100 선물은 5.1% 각각 하락했다. 지난주 S&P500지수와 다우지수 낙폭이 2020년 6월 이후 최대치를 기록한 데 이어 선물 시장마저 무너지며 경제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는 양상이다.
이처럼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는 것은 관세가 트럼프 대통령의 기대대로 미국의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무역 상대국들의 보복으로 이어져 글로벌 경기가 침체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다. 미국은 과거 1930년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 제정 당시에도 보복 관세로 인한 경제적 참사를 경험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같은 혼란에 대한 우려를 일축하는 동시에 기준금리 인하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는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게시물에서 “인플레이션은 전혀 없다”며 “느리게 반응하는 연준이 금리를 인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은 관세 부과 대상인 국가들로부터 한주에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며 “이는 가장 큰 가해국인 중국이 34%의 보복관세를 부과한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 상호 관세의 정당성을 재차 강조하려는 의도다.
그간 시장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금리인하를 촉구할 때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저해한다는 논란으로 이어지곤 했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미국의 경기 침체가 본격화한 만큼 연준에 대한 그의 금리인하 요구가 ‘현명한 움직임’이라는 평가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JP모건 역시 전날 발표한 보고서에서 “관세 부담으로 전반적인 경제 활동이 위축되고 고용은 억제될 것”이라며 연준이 내년 1월까지 모든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인하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금리인하에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지난 주말 한 콘퍼런스에서 “관세가 경제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몇 분기 동안 인플레이션이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그 영향력이 얼마나 갈지, 어느 정도 규모일지는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향후 금리 경로에 관해 묻는 말에는 “지금 시점에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고 답하며 “우리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며 매파적 입장을 내놨다.

관세 협의 서두르는 일본, 통화 완화 검토하는 중국
미국의 경기 침체에 대한 공포는 아시아 증시까지 집어삼켰다. 중국과 일본, 대만 등 주요 증시에서는 앞다퉈 패닉셀(공포에 따른 투매)이 이어지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에 버금가는 급락장이 연출됐다. 7일 일본 닛케이225지수는 7.83% 떨어졌으며,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는 7.34%, 홍콩 항셍지수는 13.22% 급락했다. 또 대만 대만 자취안지수는 9.70% 떨어졌다.
각국은 즉각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먼저 중국은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를 통해 “정부는 필요시 기준금리와 금융기관 지급준비율 인하, 재정적자 확대, 특별 국채와 지방정부 특수채 발행에 나설 수 있다”고 전했다. 중국의 기준금리 역할을 하는 대출우대금리(LPR)는 매월 20일(휴일인 경우 다음 영업일)에 발표된다. 이르면 오는 21일 기준금리 인하 등 통화 완화 조치를 단행할 가능성을 예고한 것이다.
인민일보는 또 “내수 확대를 위한 비상조치를 비롯해 자본시장 안정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이 시행될 것”이라며 “시장 신뢰 회복을 위한 대책 역시 순차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관세 피해를 본 산업과 기업에 맞춤형 지원을 제공할 방침”이라며 기업들이 미국 외 시장 개척과 내수 중심의 전략을 구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본은 추경 편성을 검토하는 모습이다. 미국이 일본산 제품에 24%의 상호 관세를 부과하기로 하면서 이제 막 회복기에 들어선 일본 경제가 다시 미끄러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전국 1,000여 곳에 상담창구를 설치하고 중소기업 금융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 또한 “이번 관세는 국난에 가까운 사태”라고 정의하며 “최대한 빨리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과 미국은 각각 담당 장관을 지명해 관세 협의를 지속하기로 했다.
0%대 성장 우려에 한은 고민 깊어져
한국 또한 상황이 다르지 않다. 7일 코스피지수는 5.57% 급락한 2,328.20에 거래를 마쳤으며, 코스닥지수는 5.25% 밀린 651.30에 마감했다. 급격한 폭락장이 연출된 유가증권시장에서는 오전 9시 12분 매도 사이드카(5분간 프로그램 매도 호가 효력 정지)가 발동되기도 했다. 이날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5대 금융지주와 정책금융기관을 소집한 자리에서 “100조원 규모의 시장 안정 프로그램을 집행하겠다”고 밝혔다. 관세 충격을 최소화하는 데 만전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당국의 대응책 마련에도 올해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은 하방 압력이 높아졌다. 일부 해외 투자은행(IB)에서는 0%대 성장까지 언급할 정도다. JP모건은 1.2%에서 0.9%로 전망치를 내렸고, 골드만삭스는 1.8%에서 1.5%로 낮춰잡았다. HSBC 또한 한국의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7에서 1.4%로 내렸다. 한국은행이 1.5%의 전망치를 유지 중인 것과 대조적이다. 일반적으로 민간에서 평가하는 경제 상황이 정부 기관보다 비관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간극이 크다는 게 시장 참여자들의 주된 견해다.
또 다른 IB는 한은이 경기 부양을 위한 금리인하에 속도를 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씨티은행그룹은 “한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일부 해소되면서 원-달러 환율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며 “이에 따라 외부 충격에 대한 한은의 우려가 완화되고, 통화정책 여력이 커졌다”고 예측했다. 바클레이즈 역시 “한은이 늦어도 5월에는 금리인하 시그널을 보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변수는 가계부채 증가세다. 서울시의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 및 번복 여파로 부동산 관련 가계부채 증가 우려가 확산하면서 간신히 잡혀가던 가계부채가 다시 늘어날 조짐을 보인 탓이다. 지난해 9월부터 다섯 달 연속 3,000건대에 머물던 서울 월간 아파트 거래량은 지난 2월 6,000건을 돌파했으며, 3월 거래량은 신고 기한이 약 한 달 남았음에도 7,000건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통상 주택 거래량 증가는 1~2개월 시차를 두고 가계대출 증가로 이어진다.
한은은 지난 3년 동안의 긴축을 통해 이룬 가계부채 하향 안정 추세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이달 초 한국금융연구원이 개최한 콘퍼런스에서 “15년 동안 한 번도 꺾인 적 없는 가계부채 비율이 꺾인 것은 큰 변화”라면서 “잠시라도 2~3년간 이룬 성과가 악화하지 않도록 다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가계부채 비율은 2021년 3분기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99.3%까지 치솟았고, 금리인상이 본격화한 2022년 말에는 97.3%로 낮아졌다. 이후 2023년 말에는 93.6%, 지난해 말 90.5%(추정치)까지 내려왔다. 정부 당국은 중장기 가계부채 하향 안정화 목표로 80% 미만을 설정한 바 있다. 금리인하 필요성에 대한 시장의 공감대가 형성됐음에도 한은이 당장 오는 17일로 예정된 4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인하를 결정하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에 힘이 실리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