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엔저’에 엔화 예금 폭증, 추가 하락 가능성 상존 “엔테크 신중해야”

올해 상반기에만 엔화 예금 '1.4조원' 늘어
엔저 장기화에 환전 규모는 작년보다 감소
하반기 美·日 금리 격차 등 '통화정책'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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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달러 환율이 37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가운데 국내 5대 은행의 엔화 예금 잔액이 올해 들어 약 1조4,000억원 가까이 불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엔화 가치 급락에 저가 매수를 노린 예금으로 분석된다. 다만 엔저가 장기화하면서 엔화 예금 잔액 증가세는 둔화했으며, 원화를 엔으로 바꾸는 환전 규모 역시 지난해보다 줄었다.

5대 은행, 저가 매수 노린 엔화 예금 역대급 급증

2일 은행권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의 엔화 예금 잔액이 지난달 27일 기준 약 1조2,924억 엔으로 집계됐다. 같은 날 원·엔 재정환율 마감 가격(100엔당 864.37원) 기준으로 환산하면 11조1,711억원 규모다. 5대 은행의 엔화 예금 잔액은 지난해 4월 5,978억 엔(약 5조1,300억원)까지 감소했다가 5월부터 가파르게 증가하기 시작해 같은 해 9월 말 1조 엔(약 8조5,800억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말과 비교하면 올해 들어서만 1,594억 엔(약 1조3,780억원)이 증가했다.

엔화 예금 잔액이 증가한 것은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환차익을 기대한 투자 수요가 늘어난 영향으로 풀이된다. 최근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37년 6개월 만에 최저 수준까지 떨어지는 등 ‘슈퍼 엔저’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엔·달러 환율은 지난달 28일 달러당 161엔을 돌파해, 지난 1986년 12월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다. 같은 날 원·엔 재정환율도 100엔당 855.60원으로 2008년 1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다만 올해 상반기 엔화 예금 잔액의 증가 폭은 지난해 상반기 2,063억 엔과 하반기 1,957억 엔보다 다소 축소됐다. 엔화 환전 규모 역시 지난해보다는 줄었다. 올해 들어 지난달 27일까지 5대 은행의 엔화 매도 건수는 170만4,486건, 매도액은 약 1,716억 엔으로 집계됐는데, 모두 지난해 상반기(195만2,455건·1,853억 엔)와 하반기(219만3,070건·2,271억 엔)보다는 감소한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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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日 기준금리 격차 좁혀지지 않으며 엔저 심화

이러한 역대급 슈퍼 엔저는 미국과 일본의 장기금리 격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으면서 더욱 심화하고 있다. 외환시장에 미국·일본 간 금리 격차가 장기간 지속될 것이란 기대감이 작용하면서 달러 매수, 엔화 매도 거래가 엔화 약세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미·일 기준금리 차와 엔·달러 환율의 상관관계는 0.91로 사실상 정비례한다.

이에 올해 초까지 세계 유일의 마이너스 금리를 이어오던 일본은행(BOJ)은 엔화 약세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 3월 19일 8년 만에 기준금리를 -0.1%에서 0~0.1%로 인상했다. 수치상으로는 0.1%p 오르는 데 그쳤지만, 2007년 2월 이후 17년 만에 금리 인상이라는 점에서 큰 변화로 볼 수 있다. 금리 인상 직후에는 일본 정부가 긴축 행보를 강화할 것이란 시장의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 달인 4월 열린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일본은행은 기준금리를 동결했고 이후 엔화 가치는 더 급격히 하락했다. 이에 시장에서는 일본 추가 금리 인상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견해가 확산했다. 반면 미국에서는 예상과 달리 인플레이션이 쉽게 완화되는 조짐이 보이지 않음에 따라 금리 인하가 늦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엔화 약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는 모습이다.

급기야 일본 정부는 지난 4월 26일부터 5월 29일까지 9조7,885억 엔(약 84조9,367억원)을 투입해 환율 방어에 나섰다. 당시 외환시장 개입이 일정 정도 효과를 보이면서 달러당 160엔 안팎이던 엔화 가치가 150엔 초중반을 기록했다. 그러나 4월 이후 두 달 만에 다시 엔화 가치가 급락하는 등 반짝 효과에 그쳐 일본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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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엔화 약세 이어져, 원화 동조화도 고려해야

주목할 만한 점은 엔저 국면에서 원화 가치도 동반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엔간 동조화 현상이 강해진 상황에서 엔화 가치 급락 현상은 원화 가치 하방 압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는 엔화 가치가 추가 하락할 경우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설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원·달러 환율은 외환 당국의 지속적인 구두 개입 경고로 1,380~1,390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는 시점은 9월,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는 9~11월경이 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일본 정부가 해외자산 매도와 공격적인 긴축 조치를 추진한다면 국내 금융시장에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오는 9월까지 강세 반전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면서 엔화 예금 투자에 대해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더욱이 당장은 엔화의 단기 가치 상승을 기대하기 어렵다. 장기적으로 엔화의 가치가 상승하겠지만 그 속도가 기대보다 많이 느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슈퍼 엔저 현상에 일본 주식에 투자한, 이른바 ‘일학개미’들은 평가손실이 커지자 매도세로 돌아섰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투자자는 일본 증시에서 2,082만 달러(약 289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2억624만 달러를 매수하고 2억2,706만 달러어치를 매도하면서 지난해 3월 이후 월 기준 첫 매도 우위를 보였다.